참으로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책 한 권을 읽는데 사흘을 바쳤다. 힘이 들거나 지루해서가 아니다. 이야기들이 지닌 재미와 술술 읽히는 속도감 있는 문체는 책을 쉬이 놓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실제로 내 아내와 대학생 딸아이는 재미에 푹 빠져서 하루에 다 읽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하루에 다 읽어치워 버린다는 것은 왠지 작가에게 미안해지는 일이었다.
작가는 이 책을 쓰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한 해밖에 걸리지 않았지만"이라는 말을 했다. "쓰는 데는 한 해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소설에 담겨진 내용들은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 공부해온 노력의 결실"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손으로만 쓰지 않기 위해 발품도 많이 팔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오랜 세월 전국 곳곳은 물론이고, 고구려 역사의 실체를 찾아서 중국 동북 3성 여러 지역의 유적들을 샅샅이 찾아다닌 고생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순(耳順)을 넘긴 작가가 그렇게 오랜 세월 사료 연구와 현장 답사의 노고들을 집약시켜 꼬박 일 년의 작업 끝에 완성한 책 한 권을(달랑 한 권이라 해서) 하루에 읽어치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되돌아가 다시 읽고, 곱씹고 되새기며, 그리하여 황원갑이라는 작가의 철두철미한 역사연구 노력에 편승하듯이 역사공부도 착실히 하면서, 사흘 동안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정말 재미있고 가치 있는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이 실로 확연하다.
작가는 자신을 일러 '신 내린 사내'라는 표현을 했다. "12명 '여왕'들의 '독백'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난 한 해 동안 기꺼이 신 내린 사내가 되어 박수(남자무당) 노릇을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서문에 새기고 있다.
나는 '신 내린 사내'라는 작가의 그 표현을 곱씹으며, 오래 그 묘미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12명 여성들과 멋지면서도 신비하기까지 한 동화(同化)를 구현하고 있다. 그는 우리 역사의 이런저런 '단추'와 '등걸'로 존재하고 있는 12명 '여걸'들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일에 그들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다. 그들의 입으로, 다시 말해 '독백체'로 그들의 비범했던 일생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직접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형식의, 사상 초유의 독백체 역사소설은 참으로 각별한 감흥을 안겨준다. 그런 독백체 형식으로 말미암아 작가가 12명 여성들과 '일체(一體)를 이루는 듯한 확연한 질감 속에서 나는 야릇한 부러움마저 느꼈다. 그것은 정말이지 묘한 '질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일인칭 독백체 형식은 저자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것은 황원갑 작가의 '개성'의 소산이리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것으로 하여 이 책은 단순한 역사물의 범위를 넘어 탁월한 소설의 자리에 존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한국 역사인물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작가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아기자기하고도 감칠맛 나는 독백체 문장은 여성의 목소리를 그대로 독자에게 안겨주면서 갖가지 흥겨움을 선사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심심찮게 '여걸'이라는 칭호를 받는 여인들의 여리면서도 교태 어린 웃음소리도 아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소설가 황원갑은 여성에 대한 각별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지난 수천 년 간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온 우리나라 여성 암흑기에도 그 어떤 남성 못지않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여걸, 훌륭한 일생을 보낸 여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악녀, 독특하거나 멋진 풍류의 삶을 살다간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자취"를 그들 본인의 입으로 되살려본 소설집임을 강조한다.
그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남존여비 사상과 사대주의 근성을 대단히 혐오한다. 특히 신라 선덕여왕의 입을 통해서 김부식의 굴절된 유학 사상을 날카롭게 통박하는데, 김부식에 대한 냉철한 시각을 여러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우리 역사에 3명의 여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신라에 대한 이런저런 부정적인 역사관 속에서도, 신라가 3명의 여왕을 배출했다는 사실에 무한히 고마움을 갖는다.
3명의 여왕을 갖고 있는 우리 역사가 점점 근세로 오면서 남성들만의 오종종한 역사로 이어져온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는 까닭에 처음 황원갑씨의 <나를 여왕이라 부르라>를 접한 순간에는 조선조의 여성은 과연 몇 명이나 포함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황원갑씨 역시 고려시대와 조선조에서는 '여왕'으로 부를 수 있는 여성을 많이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고려의 천추태후와 조선의 문정왕후, 기생 황진이를 제외하고 절대 다수인 아홉 명이 삼국시대의 여성인데, 그것은 우리 역사가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들이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많이 누렸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을 법하다.
소설가 황원갑씨는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 '소설을 재미있게 꾸미기 위해서라는 구실을 내세워 없었던 사실을 있었던 듯, 있었던 사실을 없었던 양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혐오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방송 사극들의 극심한 역사 왜곡 현상들을 본문을 통해서도 예리하게 통박한다.
그는 소설이든 방송 사극이든 사실(史實) 뼈대를 정확하게 갖추고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 수가 있다고 말한다. 소설이나 방송 사극의 역사 왜곡은 결국 작가의 무지와 역사인식의 결여,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얘기다.
오랜 세월에 걸친 우리 역사에 대한 치열한 공부와 연구로 소설가 황원갑은 그동안 역사 관련 저서들을 많이 저술해 왔다. 그런 저력으로 그는 우리 역사 속에 이런저런 비중과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 여성 12명을 그들의 절절한 육성으로 오늘 부활시켜 놓는 일을 했다. 참으로 뜻있는 일이다.
그의 저력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특색 있는 역사인물소설 <나를 여왕이라 부르라>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