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회찬 후보의 경선 승리 전략은 패션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연설회나 토론회에서 양복 웃옷을 벗어버린 채 파란색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어 올린 차림으로 나타난다. 권영길 후보의 경륜에 맞서 패기와 추진력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노 후보의 가장 큰 우군은 대학생 지지자. 대학의 강연 요청은 어김없이 가는 편이다.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대학생들을 민주노동당 지지자로 만들어왔다. 가령 대학 등록금 문제라면 "세계노동사와 세계진보운동사를 훑어가면서 3분에 한번씩 웃도록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운동 인생 30년'의 노회찬 후보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교과서와 다른 현실을 목도하고 '자생적 운동권'의 길로 들어섰다.

노회찬 후보에겐 '괴물'이라는 별명이 있다. 없는 살림이지만 '악기 하나는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모의 권유로 중학교 때 첼로를 배웠고, 100m를 12초3에 주파하는 육상선수이기도 했다. 또 생물 채집에 빠져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이상한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다리>와 <사상계>를 교과서 삼고, <레닌 전기>와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을 읽었다. 문학잡지도 4개나 정기구독 했다고 한다.

정치판을 갈아엎는 노회찬의 촌철살인 어록은 그런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게 아닐까.

"교과서와 다른 현실에 충격"

▲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예비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신 반대 투쟁'을 했다고 들었다.
"시골에 있다가(부산중학교 졸업) 홀로 상경해서 일면 자유롭고 다른 데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이런저런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반정부 잡지도 봤다. 가장 큰 충격적이었던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이 선포되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책에선 분명히 '국회해산 금지'라고 배웠다. 내가 교과서를 잘못 읽었나 뒤져보니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당시 광화문에 있던 정부청사와 국회로 갔다. 장갑차와 탱크가 있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조선일보> 가판을 샀는데 '국회해산'이라 써있었다. 다음 날 배달판을 보니 좀더 긍정적인 표현으로 '10월 유신선포'라 써있더라. 그 때 신문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날 이후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선생님의 말과 교과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 때 서점에서 우연히 <씨알의 소리>와 <다리>를 발견하고 애독자가 되었다. 김지하·박현채·백기완·함석헌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다리>의 발행인인 김상현(전 민주당 국회의원)씨를 찾아가 얘기 좀 하자 그러니 일단 대학부터 들어가라고 쫓아내더라. 함석헌 선생도 찾아갔다. 명동 흥사단으로 백기완 선생도 찾아갔다. 연설을 들으러 가면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가 안됐다. 좌석이 모자라 복도나 무대까지 올라가서 빽빽이 강연을 듣는 분위기가 좋았다. 더 좋았던 것은 강연 후에 흥사단 건물을 에워싼 전투경찰들 사이로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 기분, 그 긴장감이 각별했다."

- 너무 일찍 운동권이 됐다.
"고등학교 때 교내 써클을 했다. 우리끼리 비슷한 고민하는 아이들끼리 급지도 만들었다. 그때 내가 쓴 칼럼도 있는데 지금 봐도 '잘 썼네' 할 수 있는 글들이 많다."

- 기억나는 건 한편 소개해 달라.
"고 1때 쓴 것인데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장관급회담이 있었다. 북측 대표가 서울에 왔는데 북한은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몰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는 기사가 났었다. 이런 싸구려 기사와 대비해 나는 간디가 영국에 갔을 때 손 씻는 물(핑거 보울)을 착각해 마셔버렸는데 동석한 사람들이 간디가 무안해 할까봐 돌아가며 물을 마신 일화를 소개하며 쓴 칼럼이다."

- 그럼 공부는 언제 했나.
"지금 사회가 어떤 사회인데 공부를 하란 말인가. 학교 끝나자마자 청계천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사상계>를 사서 모으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정기구독 했다. 레닌과 마르크스 책을 고등학교 때 봤다. 그 때 책을 많이 봤다. 하루에 두 권도 봤다. 대학(고려대 정치외교학)도 데모하기 위해 들어갔다."

- 전기용접기능사(2급) 자격증도 있다고 들었다.
"유일한 자격증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영등포기계공고 부설 서울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갔다. 노동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용접기술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용접이 선반기술, 열관리 보다 자격증을 따기 쉽고 또 취직도 쉬웠다. (노동운동) 현장에 보다 전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웃음)."

"대학 나온 여성운동가들에게 존경받는 나의 아내"

- 부인 김지선씨도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나지 않았나.
"운동으로는 나에게 한참 선배다. 70년대 초반 인천지역에서 유명한 활동가였다. 어려서부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다니고 노동일을 하다가 운동에 뛰어든 경우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동지적 결합'인가.
"동지적 결합을 하려면, 남자와 결혼을 해야지(웃음). 더 가까운 남자들이 많았는데. 결혼이 늦었다. 결혼과 이성에 대해 주관이 잡혔을 때 결혼을 결정했다. 철들어 결혼한 게 다행이다."

- 김지선씨가 여성운동도 오래 해왔는데 한명숙 총리를 배출한 이른바 주류 여성운동계와는 거리가 있지 않나.
"내가 팔불출인 대목인데 한명숙 전 총리를 포함해 주류 여성운동을 이끌어온 분들이 내 아내를 높이 평가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공치사가 아니라 그 점이 자랑스럽다. 또 여기저기서 '자리' 제안이 오는데 여러 차례 거절하는 모습을 봤다. 겸손해서 사양하는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여성들을 만나는 게 더 좋다고 하더라."

- 영부인이 되어도 청와대 관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던데.
"안 가겠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혼자 있어야지. 영부인 자리가 공석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대통령과 달리 영부인은 헌법에 선서를 하지 않는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