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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를 향한 기나긴 여정 <그레이브 디거>
속죄를 향한 기나긴 여정 <그레이브 디거> ⓒ 황금가지
주인공 야가미 도시히코는 험악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정치인의 성대모사로 사무실에서 50만엔을 가로채거나 조직 폭력배의 보험증을 위조해서 사채에서 돈을 빌리기도 하고, 가짜 콘테스트를 열어 여고생들을 모은 뒤 용돈을 갈취해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가치 있는 일,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골수은행에 등록한다. 그리고 병원을 향해 길을 나서는 야가미. 이 소설은 야가미가 백혈병 환자에게 골수를 기증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악당인 것 같긴 한데 전형적인 악인과는 어딘가가 다른 것 같은 야가미, 갑자기 사라진 시체와 불화살을 맞고 숨져가는 여러명의 사람들, 이 수사를 둘러싼 수사부 경찰과 보안국 경찰들의 갈등, 그리고 중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암시들.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과 소재가 앞다투어 펼쳐지는 이 소설의 초반은 다소 어지럽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수사부 사람이고 누가 보안국 사람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 가기도 하고, 도대체 여러 가지 살인사건들과 야가미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산만한 느낌까지 준다.

이 소설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은 절반 가량이 넘어가면서부터이다. 그때쯤부터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서서히 윤곽을 잡게 되고 이중으로 펼쳐지는 추격과 이중으로 전개되는 살인사건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뚜렷하게 감을 잡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끝까지 어떻게 읽었는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몰입하게 된다.

단돈 만엔을 가지고 택시를 타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고, 전철을 타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도쿄의 남단을 향해 나아가는 야가미의 모습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있다보면 어느새 소설은 끝나 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맨 앞 장으로 다시 돌아가 산만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출현하기 시작했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본다. 그리고 그 모든 산만함을 모두 용서한다.

작가는 모든 걸 한꺼번에 다 하고 싶었던 것이다. 범인이 누구이고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전통적인 추리기법, 사회 구조에 대한 진지하고 비판적인 시선, 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범죄자들에 대한 관용어린 통찰, 그리고 정치권력이라는 거대괴물이 갖게 되는 비열한 속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모든 걸 한편의 소설에 담으려다 보니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 산만한 욕심을 모두 채웠다. 모든 것이 하나의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되어, 재미라는 윤기를 마음껏 흘리며 매끄럽게 돌아가게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미학 중 단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야가미’라는 특이한 악당 캐릭터의 등장일 것이다.

...두 건의 살인을 야가미 도시히코의 범행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기억 속의 야가미라는 비행소년은 틀림없는 불량배이긴 했어도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아니었다. 더욱이 엽기 살인을 저지를 정신이상자도 아니었다. 분명히 마음이 따뜻한 놈이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니 야가미의 타고난 성격이 떠올랐다. 녀석에세근 특유의 유머감각이 있었다. 인간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구분해내는 경계선은 유머 감각이 있고 없고에 달렸다고 본다...


야가미는 악당이지만 살인이나 방화, 강간같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은 결코 아니다. 아동 학대를 일삼는 악마같은 아버지를 만났지만 야가미는 가난과 범죄 소굴 속에서도 언제나 유머감각과 소박한 인간미를 잃지 않았다.

야가미는 작가가 범죄자라는 존재에게 보내는 면밀한 시선을 상징적으로 입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왜 그들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범죄자들이 처했던 환경에 비해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면 그들의 범죄는 상대적인 시선으로 보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이가 범죄자가 되었다는 경우 또한 들어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이 단지 재미만 주는 게 아니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심오하게 끄덕이면서 <그레이브 디거>를 다시 한 번 드르륵, 넘겨 본다. 멋있는 책이다.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2007)


#그레이브 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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