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종의 국가 경영과 21세기 신문명” 학술대회 모습
“세종의 국가 경영과 21세기 신문명” 학술대회 모습 ⓒ 김영조
5월 14일에 있었던 국립국어원과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주최의 “세종의 국가 경영과 21세기 신문명” 학술대회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것은 동북아시대위원회 배기찬 기획실장이 “세종은 외교안보정책을 어떻게 펼쳤나?”란 제목의 발표에서 “세종임금은 명에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몇몇 토론자와 청중이 반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자주적인 임금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명에 지성으로 사대했다니 모두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정말 배 실장은 세종을 사대주의로 본 것인가?

지성사대로 볼 수 있는 예를 그는 여러 가지를 들고 있다. 먼저, 세종실록 25권, 6년(1424년) 9월 2일자 기록을 보면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하들이 홍무제의 유조에 “천하의 신민들은 3일 만에 복을 벗으라”라고 했다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27일 동안이나 상복을 입었다.

또 명은 여러 차례 1만에서 3만 마리의 진헌마(進獻馬, 중국 황제에게 바치던 말)를 바치라고 요구한다. 이에 국방력 약화를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지금 만일 칙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한다면 오해할 우려가 있다.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정성껏 사대하였다”라며 명에 말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세종 14년에는 농업국가의 중요한 자산인 소 1만 마리를 달라는 명의 요구를 수용하기도 했다.

단순히 이런 세종의 행적만 보면 분명 ‘지성사대’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과연 세종이 명을 끔찍이 사대하여 그렇게 했을까? 물론 배 실장은 세종을 단순 사대주의자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지성사대의 효과로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고,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명에 복속한 여진족을 정벌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성사대는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일까?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한 고도의 전술전략

세종장헌대왕실록 표지
세종장헌대왕실록 표지 ⓒ 국사편찬위원회
누구나 세종의 가장 큰 공적을 훈민정음 창제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처럼 한국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한글만한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까?

세종실록 103권, 26년 2월 20일자 기록에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한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중국을 섬기는 나라에서 감히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 수 있느냐는 힐난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는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이었을 것이다.

물론 세종도 사대주의 정치 논리에 따랐겠지만 어떤 맥락에서 어떤 식의 사대주의를 했느냐가 중요하다. 조선이 건국한 지 50여년 밖에 안 된 터여서 아직 나라의 기틀도 완전치 못한 때에 어쩌면 훈민정음 창제로 중국에게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한 까닭도 있었을 게다. 따라서 세종은 사대주의를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자신의 집권기간 중 훈민정음의 창제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업무를 모두 위임한 상태에서 훈민정음 창제 업무는 요양하러 간 행재소에서도 놓지 않았으며, 최만리 등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중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종은 최만리의 반대가 없었더라도 전술전략을 고려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그 가운데 하나는 훈민정음 창제를 공주와 왕자 등 최측근의 도움만 받아 극비리에 진행했다. 드러내놓고 진행했다면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 간송미술관
또 세종은 창제하고 반포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훈민정음을 자연스럽게 정착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소장 학자로서 훈민정음 연구로 주목받고 있는 김슬옹 교수는 “조선 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2006, 한국문화사)”에서 세종이 편 훈민정음 정착 과정을 다음처럼 정리했다(119쪽).

“창제(1443)-운회 번역(1444)-최만리 반대 상소 논쟁(1444)-해외학자 자문(1445)-용비어천가 실험(1445)-완성ㆍ반포(1446)-공식 문서(의금부, 승정원)로 실천(1446)-언문청 설치(1446)-문서 담당 하급관리 시험제도 시행(1446)-다음 과거부터 모든 관리 시험에 훈민정음 실시 예고 (1447)-최초의 언문 산문책 ‘석보상절’ 간행(1447)-세종 친제 ‘월인천강지곡’ 간행(1447)-사서 번역 지시(1448)-정승 비판 언문 투서사건(1449)”

이로써 백성은 물론 사대부들도 어쩔 수 없이 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나간 세종의 철저한 지략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지성사대는 세종의 뛰어난 전략

영릉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영릉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 김영조
세종은 최만리 등의 반대가 아무리 거세도 학문적으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은 언어학에 관한 한 어느 신하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만리의 격렬한 상소에 세종은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일축할 정도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바탕인 음성학, 음운학, 문자학 따위에 통달했음은 물론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만일 그런 바탕이 없었다면 최만리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였다. 니라의 바탕이 아직 튼튼하지 못한 때에 명이 문자 창제를 빌미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나라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여기에 세종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밤 2경이 넘었는데 임금이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한다”란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고민을 했고, 그래서 명의 요구를 철저히 따랐음은 물론 앞장서서 지성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훈민정음 연구자들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이후 창제에 관한 명의 반응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세종의 전략이 주효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다른 문자처럼 오랑캐들의 것이라 하여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세종이 지성으로 사대하는 모습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술회의에서 지성사대를 애기한 배 실장이 말한 지성사대의 효과들은 훈민정음을 무사히 창제하고 반포하는데 시비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는 필적할 것이 아닐 것이다.

600여 년 전의 세종임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갔음은 물론 현대 정치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요즘 정부는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얻는 것보다는 잃는 외교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때 세종의 훈수대로 보이지 않는 전략을 통해 강대국의 뒤통수를 치는 슬기로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대자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종#훈민정음#지성사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