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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꽃밭에 원없이 얼크러진 나팔꽃
ⓒ 조명자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라는 노래 가사가 있지요? 이른 아침 해뜨기 전 잠깐 피었다가 해뜨기 무섭게 잎 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나팔꽃을 볼 때마다 이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팔꽃을 유난히 좋아해 심기는 많이 심었는데 아침잠이 많은 탓에 제대로 감상을 못하는 안타까움. 오늘 이 숙원을 풀었습니다.

비 그친 아침입니다. 빗방울을 함초롬히 담은 나팔꽃들이 활짝 폈습니다. 여느 때 이 시간이라면 꽃잎 돌돌 말고 엥돌아져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두꺼운 비구름에 시간을 잊었는가 봅니다. 전생에 햇빛하고 원수를 졌는지 햇빛만 얼씬했다 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치는 깍쟁인데.

▲ 짙푸른 심연 속에 빠진 듯, 처절하다
ⓒ 조명자
▲ 저 파란 빛 속엔 꼭 산호가 있을 것 같다
ⓒ 조명자
시퍼런 심연을 담은 나팔꽃도 피었습니다. 먼바다 빛깔을 담은 연 코발트색 나팔꽃. '빵~' 기상나팔이라도 불 기색으로 곧추서있습니다. 요놈이 바로 우리 집 꽃밭에서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놈입니다.

▲ 귀하신 몸, 하얀 나팔꽃
ⓒ 조명자
어찌 파랑색 뿐일까요? 귀하신 몸 하얀 나팔꽃도 있답니다. 나팔꽃 노래를 불렀더니 멀리 서울에서 사는 언니가 당신 남편 출장길에 특별히 부탁해 구해다 준 꽃씨입니다. 아마 일본에서 구해왔다지요?

▲ 화개장터 상선암에서 시집 온 빨간 나팔꽃
ⓒ 조명자
안방마님처럼 체구도 큰 빨강 나팔꽃은 화개장터 옆 상선암에서 구해 온 것입니다. 어느 날 여름, 보름 달빛에 일렁이는 섬진강을 보고 싶어 상선암에 갔다가 무리진 나팔꽃이 어찌나 예쁜지 스님께 부탁해 씨앗을 얻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어떤 놈들이 피고 지는지 아시겠지요? 오늘 아침, 빗방울에 젖은 나팔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얼핏 옛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나팔꽃처럼 짧았던 풋사랑의 기억.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쑥스러운 옛 인연이 왜 그렇게 아련하던지요.

파마머리 아줌마처럼 지독한 곱슬머리에 눈알 팽팽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 피부까지 하얘 얼핏 보면 남성적이기보단 여성 쪽 이미지가 강했던 사람이 내 풋사랑 상대였지요. 외모로만 따지자면 내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베토벤을 닮은 남자' 별 매력이 없었던 그 사람이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나팔꽃처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모임에 나타나질 않아 찾아 봤더니 비좁아터진 자취방에서 몇 날 며칠을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 없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그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나 봅니다. 들리는 말로는 어느 대학 법학과에 수석 입학인지, 졸업인지를 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사시를 포기하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와 하필 내 파트너가 되다니요.

공단 벌집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모임에서 그는 '노동법'을, 나는 '실무'를 지도하는 소임을 맡게 돼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생긴 대로 논다고, 그는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제 생각과 다르면 사정없이 핏대를 올리며 '지랄'을 해서 "뭐, 저런 밥맛이 있나?" 맞받아 옥신각신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런 '밥맛'이 또 연인은 절세가인을 만났더군요.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 조명자
▲ 새색시 다홍치마?
ⓒ 조명자
언젠가 연인과 함께 한 그를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줍게 자기 연인이라고 소개하는데 어찌나 곱고 단정하던지 같은 여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이 예쁘면 머리가 비었거나 싸가지라도 없어야 공평할 텐데 그녀는 미모면 미모, 학벌이면 학벌 하다못해 직업까지, 어디 한 군데 버릴 곳이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아무리 지적 허영심이 많고 학벌 추앙주의 광신도라 할지라도 임자 있는 물건은 넘보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체면 정도는 갖춘 나였습니다. 성질도 지랄 맞고, 임자도 있고… 전혀 곁눈질을 줄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는데 "뭐땀시 내 맴을 짠하게" 만들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는지.

한참 앓고 난 후에 어느 찻집에서 마주앉았습니다. 문병을 와 준 것이 고마웠던지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표정이 순하게 풀려 맑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개인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담담한 어조로, 그 즈음에 그에게 닥친 신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왜 그렇게 내 마음이 아리던지요. 그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 역시 못 들은 이야기 마냥 시침 뚝 따고 맡은 일에 열중해서 드디어 목표했던 사업장 노조 결성이 성공했던 것입니다.

1년 정도의 프로그램이 끝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웅다웅 치받으면서도 열심히 노력해 소기의 성과를 올렸으니 싱겁게 돌아설 수는 없었지요. 둘이서 마지막 '쫑파티'를 열었습니다. 마른안주가 나왔던 생맥주집에서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처럼 건넨 말.

"얀마, 내가 너 많이 좋아했다. 따뜻한 마음이 좋아서… 누군진 몰라도 너 데려가는 놈 아주 운 좋은 놈이야. 하하하~~"

그리곤 내 곁에 다가와 가만히 품에 안았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서 좋은 지도자가 돼라. 너는 정말 능력있고 마음이 곧아 노동계에서 꼭 필요한 지도자가 될 거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정색을 한 인사말에 "쳇, 그 정도 하고 꼬리 내리냐?" 볼멘소리로 대꾸했지만 속마음까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얀마, 나같이 별 볼일 없는 놈이 무엇을 하겠냐? 나야 곁다리지, 이제부터 네 몫이다. 헛소리 말고 열심히 해."

미국 변호사가 됐다는 백발의 베토벤을 남편과 함께 간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부딪혔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가 남편에게 악수를 청하며 농담을 건넸습니다.

"내가 선생보다 이 여자를 먼저 알았으니까 옛 정으로 한번 껴안아 보겠습니다."

우리는 얼싸 안았습니다.

"얀마, 넌 하나도 안 늙었다. 너 보고 싶어서 수소문했었는데…."

태그:#나팔꽃, #사랑,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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