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들어와 명함을 건넨다. 아마 네가 주인인 줄 알고 명함을 주는 데 보니 문을 달아주는 창호업자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갔다. 갑자기 집안 소식이 궁금하여 의정부로 전화를 거니 지금 경기도는 비가 오고 있다고 했다. 옆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밥에 소주를 한 잔 먹고 나니 잊혀진 옛 여인처럼 잠이 솔솔 찾아왔다.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한숨 꼬박 자고 논을 쳐다보니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논에 작은 물방울들이 일고 있었다. 자전거를 처마 밑에 집어넣고 기다렸지만 금방 날이 갤 것 같지도 않아 출발을 결심했다.
그런데 가방을 만지니 축축했다. 아마 내가 깜박 잔 사이에 소나기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계속 내리는 비의 양도 적고 하여 비옷을 입고 출발했다. 한참 타고 가니 휴게소가 하나 나타났다. 그냥 지나칠 요량으로 가다가 비를 피해야 할 것 같아 핸들을 바꿔 들어가니 <용머리 휴게소>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 주유소가 있어 자전거를 세우고 휴게소 쪽으로 가니 깃발을 안에서 보고 있었는지 매점 아줌마가 금방 나왔다. 그리고 전국일주를 하느냐고 친절하게 다가오더니, 커피 한 잔 할 거냐고 물었다. 너무 고마워 예, 하고 대답을 하니 금방 가지고 나왔다.
비 오는 휴게소에서 음료수 회사가 준 것 같은 빨간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차를 마셨다. 아까 매점 안에서 산 과자를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한참을 이야기 하고 나니 비가 서서히 개기 시작했다. 주유소에 맡겨둔 자전거를 찾아 다시 안장에 오르니 배가 고파왔다. 자전거 여행은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 아마도 에너지 소비가 그만큼 많은 모양이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세상의 번잡스러움을 알다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별일 아니겠지 하고 계속 가는데 그 소리는 여전히 따라왔다. 이상하여 자전거를 세우고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짐받이에 실은 자전거 가방이 양쪽으로 쳐져 바퀴에 닳아가고 있었다. 한쪽은 벌써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찔레꽃 뿌리로 담근 술병도 반쯤 닳아 있었다.
더 이상 가기가 곤란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니 그 시골 찻길에 애견센터가 있고 포장마차 비슷한 간이매점도 있었다. 그리고 애견센터 옆 공터에는 나무들이 쌓여있었다. 약간 썩었지만 그래도 쓸만한 나무를 골라 톱을 빌리기 위해 애견 센터 마당으로 가니 더 좋은 나무가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쓰라고 하여 그럴듯하게 안장을 만들고 가방을 실으니 깨끗한 모양이 정말 여행자 자전거 같았다. 배도 고프고 슬슬 막걸리 생각도 간절했다. 옆에 포장마차 같은 곳에 들어가니 할머니 혼자 무엇인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계셨다.
메뉴판을 보니 마땅한 것이 없고 경비도 절감해야 하기 때문에 토스트를 시키려고 하니 2000원이나 되었다. 할머니에게 비싸다고 했더니 그런 소리 처음 들었다고 하면서, 가운데 계란을 넣어 큼직한 토스트를 가지고 나오는데, 과연 2000원을 받을 만했다. 끝까지 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말한 나의 행동을 후회하며 물을 보충하고 출발했다.
이제 길은 강원도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사위(四圍)가 조용해져 왔다. 경기도 길에서는 그렇게도 복잡하고 시끄럽더니, 주위가 조용해지자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그제야 내 주위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다이모니온(daimonion 양심)의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 조용해지고 나니 비로소 세상사의 번잡스러움을 알 것 같았다. 길 위 들꽃들도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수많은 짐승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잠자리, 나비, 뱀, 족제비…
생명들의 사라짐과 스러짐. 생(生)과 사(死)의 거리가 단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사람과 다른 뭇 생명들과 공존이 되지 않은 이 문명 속에서는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하면서, 애당초 다른 생명체데 대한 배려는 없다. 그들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그런 생각도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자연을 파괴의 대상으로만 인식할 뿐 그러니 고개를 들어 눈을 둘러보면 곳곳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드디어 홍천 읍내에 도착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해져 오고 잠자리 찾는 것이 급했다. 산 밑에 큼직한 주차장이 있어 들어가니 예술회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 한 대 두 대 들어오더니 아주머니들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산 밑쪽에서 자기로 하고 예술회관 안으로 들어가니 합창 연습이 한창이었다. 물을 보충하고 있는데 관리자인 듯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줘서 마시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둘째 날의 밤도 깊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주위는 깜깜했고 그런 상황에서 텐트를 치려고 하는데 노끈하나 묶기도 곤란했다. 대충 치고 안으로 들어가 자려고 하니 도저히 비좁아서 잘 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방이 답답해 항상 응접실에서 잤는데 갑자기 처량한 생각까지 몰려와 짐을 꾸렸다. 앞으로는 찜질방에서 자야 할 것 같았다. 강을 건너 시내로 갔다. 슈퍼에 앉아 페트병 맥주 한 병을 다 마셨는데도 속이 가시지 않아 한 병을 더 마시고 홍천사우나로 갔다. 시골이라 몹시 허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