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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압전류가 흐르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철조망.
ⓒ 허선행
인간의 잔혹함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내 여행기 노트에는 출발 전부터 사전 정보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립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박물관이 된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둘러보고 난 후 노트에 적을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겨우 "인간의 잔혹"이라고 크게 써 놓고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을 뿐이다.

여행의 시작이 행복한 아침이라고 했었는데 이게 뭔가. 지금의 나를 행복하다고 해도 되는 걸까? 그저 남의 일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눈물겨운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그곳에서 본 것을 적어 본다.

7월 25일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를 데리고 간 우리 가이드는 마치 죄수를 끌고 가는 교도관처럼 보였다. 아니, 그곳에서 우리는 꼭 죄인이 된 기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심각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에 감히 불평 한 마디 늘어놓지 못한 채, 한 줄로 서라면 서고 왼쪽으로 가라면 왼쪽으로 가는 꼴이다. 가이드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설명은 매우 꼼꼼하게 했다.

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했는지, 어떤 사람이 끌려 왔는지, 어떤 처참한 생활을 했으며, 어떤 실험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입구에 희생된 분들의 유골을 모셔 놓은 걸 보았다. 나도 모르게 모자를 벗고 분향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입술까지 실룩거려지는 걸 보니 마음 약한 내가 과연 그곳을 다 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주하는 줄 알고 온 유태인의 큼직한 가방. 그들의 죽음을 앗아간 이들은 그들의 이주지로 그리던 "캐나다"라는 이름을 희생된 방에 붙여줬다니 그보다 더 악랄 할 수 있을까?

"이럴 수가!"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안경은 안경대로 신발은 신발대로 분류해서 놓은 건 그렇다고 치자.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어린아이의 신발과 옷가지를 보자 그만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갓난아이의 우유병도 눈에 띄었기 때문에 더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우리에게 다소 불친절하고 딱딱하게 보였던 이곳의 가이드를 이해하게 되었다.

혹여 억울한 주검 앞에서 우리가 혹여 웃고 떠들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있을까 우려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장으로 여겨 들렀기 때문이다.

"유럽은 게르만족 것이다"라는 오만함에 동족마저 장애인라는 이유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니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곳에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의수족도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종교적인 이질감이 불러온 민족말살 정책의 현장을 고스란히 교육의 장으로 보여주는 이들도 대단하다. 내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분노가 이럴진대 그들은 어떠할까? 후손들에게 이곳을 보이는 것이 더욱더 강인한 국가로 거듭나는데 분명 보탬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가이드가 질문했다. 천을 가리키며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알아맞혀 보라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궁금해 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끝끝내 그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원단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다음 방에는 머리카락만 모아놓은 방이었는데 그 양이 산더미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에 있는 머리카락의 색이 똑같이 희뿌옇게 보였다.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이 다 다른데 똑같은 색깔로 된 것은 독가스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약품으로,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집단 학살되었기 때문이란다.

아직까지도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착각에 내 코를 막고 말았다. 여러 방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다. 수감될 당시 찍었다는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사진 속 인물들이 자꾸 생각났다. 다들 귀하고 귀한 자식이거늘.

지금은 고압전류가 흐르지 않으니 만져 봐도 된다는 철조망을 설명하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망을 갈래야 갈 수조차 없었겠구나.' 조심스레 철조망에 손을 댔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가스실과 화장터였다. 수용소에 끌려 온 사람들이 샤워를 한다는 말에 속아 샤워실로 보이는 방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독가스로 살해된 것이다. 바로 옆에는 시체를 소각하던 소각로가 놓여 있었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검은 그을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가늠하게 한다. 소각로가 모자라 심지어는 야외에 시체를 쌓아놓고 태우기까지 했다는 설명에 더 할 말이 없다.

▲ 가스실과 화장터
ⓒ 허선행
그곳을 둘러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들을 할까? 수용소의 책임자를 처형했다는 교수대가 희생자와 가족에게 위로가 될까? 많은 생각을 하며 우리가 들어온 수용소 정문으로 나가는 중에 방송국에서 촬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곳의 아픔을 알려 주려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 아우슈비츠에 취재를 나온 한 외신 방송국
ⓒ 허선행
실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밖에 나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수용소 정문에 있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를 보며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행진하며 일하러 오고 간 기만당한 수감자들을 생각하며 정문에서 다시 한 번 안을 들여다봤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 허선행
들어가면 소각로의 연기로밖에 다시는 나올 수 없었다던 그들의 참혹한 삶을 생각하며 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아우슈비츠는 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유럽 각국에서 폴란드 정치인,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 체코인, 슬로바키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독일인까지 이곳으로 보내져 수용되었으며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과 제2수용소는 현재까지 특별히 보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주석은 현지에서 산 한글로 된 안내서 참조했음).

*7월 24일부터 8월 1일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다음 글은 <호박이 단호박이 아니네-폴란드 중앙광장 주변을 둘러 보고>입니다.


태그:#아우슈비츠, #유태인, #폴란드, #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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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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