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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가면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옛 고향이 담겨 있다
그 집에 가면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막걸리잔 속에 추억이 가물거린다. 그 집에 가서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담긴 맛깔스런 밑반찬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먹고 있으면 어릴 때 고향 마을이 떠오른다. 바늘처럼 쏟아지는 땡볕 맞으며 거머리 우글거리는 논을 매던 아버지, 아버지께서 잠시 논두렁에 앉아 순식간에 쭈욱 마시던 그 뽀오얀 막걸리가 생각난다.
땡볕에 어찌나 많이 그을렸던지 얼굴이 컴컴해 보이던 아버지. 그때 아버지께서 마시던 그 막걸리잔도 이리저리 마구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잔 이었다. "휴우~" 땅이 꺼져라 한숨 내쉬던 아버지께서 마지막 한 방울 남은 막걸리까지 따르던 그 주전자도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주전자였다. 아버지께서 안주 삼아 손으로 한 점 집어먹는 물김치가 담긴 그 냄비도 찌그러진 양은 냄비였다.
그때 나와 동무들이 송사리, 송어, 가재, 미꾸라지를 잡으러 도랑에 나갈 때 들었던 그 '바께스'도 찌그러진 '양은 바께스'였다. 배가 고플 때마다 탱자나무 가시로 열심히 파먹던 삶은 고디(다슬기)가 담긴 자그마한 그릇도 찌그러진 양은그릇이었다. 잊을 만하면 가위질을 해대며 마을에 나타나는 그 엿장수와 엿을 바꿔먹던 쇠붙이도 다 찌그러진 양은그릇이었다.
1960년대 끝자락께.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 초가집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었던 우리 마을에서 찌그러지지 않은 반듯한 그릇은 아예 없는 것만 같았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삶도, 아버지 어머니의 삶도 온통 찌그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앉았다 일어서면 양은그릇처럼 노오란 별들이 반짝거렸다. 나와 동무들의 삶도 가난과 함께 이리저리 찌그러져 있었다.
제철에 나는 음식이 으뜸이며, 몸에도 가장 좋아
"산… 들… 바다… '자연주의 짱구네집'은 어머니의 마음을 품고 12개월 자연주의 제철요리를 전문으로 만들어 냅니다."
전남 순천교육청 맞은 편 골목을 따라 2~3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오른 편에 나지막하게 엎드려 있는 집이 있다. 언뜻 이마에 단 간판과 유리창에 깨알처럼 '촘촘촘' 박힌 차림표만 바라보면 그 집이 식당 같기도 하고, 소주만 전문으로 파는 목로주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집에 들어서면 식사뿐만 아니라 소주와 맥주, 막걸리 등 없는 술, 없는 안주 빼곤 다 있다.
이 집이 순천 시내 곳곳에 즐비한 여느 음식점과 다른 점은 '자연주의'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이 집에 들어가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산과 들, 바다 내음 폴폴 풍기는 제철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집은 제철에 나는 음식이 아니면 아예 발을 디딜 수가 없다는 그 말이다. 산과 들에서 나는 채소든,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든 모두 다….
이 집 주인 '짱구네 아줌마'는 "봄에는 서대, 쭈꾸미, 금풍생이, 병어회를 조리하고, 요즈음 같은 여름철에는 서대, 갑오징어, 갈치, 하모를 조리한다"고 말한다. 이어 그이는 "가을에는 갈치, 전어, 쭈꾸미, 산낙지, 동태가, 겨울에는 새조개, 쭈꾸미, 과메기, 간재미, 벌교꼬막, 산낙지 등이 가장 맛이 좋다"며, "무슨 음식이든 제철에 나는 음식이 으뜸이며 몸에도 가장 좋다"고 귀띔한다.
그래. 그때가 지난 7월 중순께였지, 아마. 순천교육청 맞은편에서 전통찻집을 열고 있는 권행자(48) 선생과 노병일(44) 선생을 앞세우고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밤 10시께 찾았던 그 집. 그날 그 집에는 꽤 밤이 깊었는데도 하모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하모를 입에 문 채 "아짐! 소주 한 병 더" 시키는 이도 있었다.
예닐곱 평 남짓한 실내 곳곳에 놓인 동그란 양은 탁자. 그 탁자를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놓여 있는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는 엉덩이만 겨우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자그마했다. 마치 작고 동그란 의자가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맛난 제철음식을 앞에 두고 오래 앉아 있지 말고 '싸게싸게(빨리빨리) 먹고, 싸게싸게 나가라'고 등을 마구 밀치는 것만 같다.
"여기 막걸리도 팔지요?"
"그럼요."
"어디 막걸리지요?"
"순천 막걸리지요."
"그럼 막걸리 한 주전자 하고 두부 한 접시 주세요."
저만치 음식점 한 쪽 벽에는 계절에 따라 나오는 제철음식이 예쁜 밑그림 위에 또박또박 적혀 있다. 여름인 7월에는 '갈치·하모'가 나온다고 적혀 있다. 근데, 우리들은 제철음식인 갈치나 하모를 시키지 않고 생뚱맞게 두부를 시켰다. 하지만 이 집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와 밑반찬을 주섬주섬 탁자 위에 늘어놓는다.
울퉁불퉁한 양은 막걸리잔 속에 듬뿍 담긴 젖빛 막걸리
이리저리 마구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주둥이를 타고 찰랑찰랑 넘쳐흐르는 노르스름한 막걸리…. 우리네 가난한 서민들의 힘겨운 삶처럼 울퉁불퉁한 양은 막걸리 잔에 뿌옇게 따라지는 젖빛 막걸리…. 고향의 흔적과 어머니의 손맛이 듬뿍 묻어나는 밑반찬, 동그란 양철 탁자 위에 듬성듬성 놓인 맛깔스런 밑반찬 또한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그릇에 담겨 있다.
장독에서 오래 묵어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물김치 한 점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다가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그릇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신다. 찌그러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싸악 다 비우고 나자 속이 얼얼해지면서 술기운이 짜리하게 퍼진다. 그래. 바로 이 시원하고도 짜릿한 맛 때문에 아버지께서도 그 지독한 무더위와 고된 농사일을 이겨낸 게 아니겠는가.
톡 쏘는 듯 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막걸리를 마시며 가끔 찍어먹는 고구마순무침도 향기롭고 맛이 깊다. 이 집 고구마순무침은 밭에서 갓 따낸 고구마 순을 줄기와 잎사귀 채로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된장과 멸치젓갈에 버무려낸다. 삶은 가지를 손으로 잘게 찢어 집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낸 가지나물도 부드럽게 혀끝에 녹아내린다.
여린 배춧잎 송송 솎아내 멸치젓갈과 고춧가루, 빻은 마늘 등을 넣고 살짝 버무린 겉절이김치와 입맛에 따라 갈치속젓이나 막된장에 찍어먹는 싱싱한 열무잎사귀와 파아란 상추, 노오란 속살의 배춧잎도 고향의 맛 그대로다. 특히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쭈욱' 비운 뒤 묵은지 척척 올려 한입 가득 집어먹는 하얀 손두부의 맛은 고소하면서도 뒷맛이 참 깨끗하다.
씨알 굵은 감자와 삶은 논두렁콩이 담긴 예쁜 소쿠리
권행자, 노병일 선생과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막걸리 잔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섞으며, 옛 고향의 추억에 젖어든다. 서로 주고받으며 마시는 막걸리도, 찌그러진 양은 막걸리잔도, 먹어도 먹어도 자꾸만 입맛이 당기는 밑반찬도, 그 밑반찬이 담긴 찌그러진 양은 냄비도 모두 소꿉동무들로 다가온다. 까마득하게 어린 날, 까맣게 탄 얼굴로 조잘대던 그 가시나와 반주깨미(소꿉놀이) 할 때 콩콩 찧었던 그 풀잎 내음처럼….
밤 11시, 막걸리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비워갈 때쯤 갓 삶아낸 씨알이 굵은 감자와 연초록빛을 띤 삶은 논두렁콩이 담긴 예쁜 소쿠리가 탁자 위에 놓인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며 감자 하나 껍질을 벗겨 먹자 배가 부르다. 하지만 자꾸만 삶은 논두렁콩에 손이 간다. 연초록빛 논두렁 콩알 서너 알 입에 넣어 깨물자 콩서리하던 그때의 기억이 그대로 솔솔 묻어난다.
"이 집 문 연지 얼마나 됐어요?"
"5년이 좀 넘었지요."
"왜 하필이면 음식장사 하기 꽤 까다로워 보이는 자연주의를 내세웠나요?"
"자연 그대로가 좋잖아요. 요즈음 사람들이 옛 사람들에 비해 실하지 못한 것은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그래요. 어찌 보면 자연의 균형이 개발우선주의에 깨진 것처럼 우리 몸의 균형도 비닐하우스에 깨졌다고 봐야겠지요."
아, 다시 가고 싶은 그 집.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주전자와 뿌우연 막걸리, 찌그러진 막걸리잔과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옛 고향의 흔적과 추억을 차분하게 더듬을 수 있는 그 집. 그 집에 가면 어릴 때 발가벗고 놀았던 동무들과 어머니, 아버지, 고향 어르신들의 살가운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린다. 그 집에 가면 자연이 보인다, 건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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