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아팠다. 고산병이다. 불덩이처럼 온 몸에 열이 오르고 구토를 했다. 어지럽고 욱신거린다며 힘들어했다. 호스텔 밖은 한 발작도 못 나가고 3일을 보냈다. 원주민들이 일러준 처방에 따라 코카차를 끓여주고 치킨수프도 사다 날랐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반면 페루 쿠스코(해발고도 3400m)의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파스텔 톤의 불그스레한 안데스 산이 도시를 감싸 안듯이 둘러있었다. 중앙 광장에는 옛 제국의 수도답게 잉카의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고, 여기에서 출발한 붉은 지붕의 행진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산 무릎께까지 올라가서야 멈춰 섰다. 사람들은 그 모양을 퓨마라고 말했다.
"아내가 없으니 이 황홀한 아름다움도 다 쓸쓸하네…."
난 호스텔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아내에게 한국음식을 해 먹여야할 것 같아서 부엌 사용이 가능한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오전 내내 잉카의 돌담과 돌길을 따라 골목골목을 다니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통치마를 입고 중절모를 머리에 얹은 잉카의 후손들이 지나쳐갔다.
그때였다. '아리랑 식당', 생각지도 못한 모국어가 눈앞에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수한 곰탕냄새가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강렬하게 코에 와 닿았다. 테이블 끝에 앉아있던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수사자 갈기 머리를 한 젊은 친구가 일어섰다. 그가 한국인인지 원주민인지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이…. 익-스큐즈-미…." 내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자,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페루 쿠스코에서 만난 한국 식당
"한국 분이시죠? 어서 오십시오!"
"전, 그 쪽이 원주민인줄 알았어요."
"에이, 아저씨도 남 말할 입장은 아니거든요."
사실 나의 행색도 그랬다. 긴 나그네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단벌옷은 닳고 색 바랬으며, 피부는 햇빛에 끄슬러 원주민마냥 새까맣고,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다.
"여기 앉아요. 지금은 사장님을 잠깐 도와주고 있지만, 저도 실은 여행자거든요. 그런데, 형, 장기(장기 여행자)죠? 얼마나 됐어요?"
이 친구는 어느새 나를 아저씨에서 형으로 바꿔 부른다.
"좀 오래 됐습니다."
"그런데 형,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글쎄, 잘…."
"인도 여행했었죠? 그죠? 언제 갔었어요?"
"작년…."
"그럼 아닌데…. 형, 혹시 정희 누나 알아요?"
이 친구의 이름이 '선재'다. 선재와 나는 여행길에서 만난 장기배낭족의 이름을 내놓으며 관계의 끈을 찾기 시작했다.
"기억났다! 형, 희정 누나 알죠? 누나 미니 홈피에서 봤어요. 부부여행자, 인도 쉼터, 맞죠?"
"서희정이를 어떻게 알아요?"
"사연이 많죠. 방콕에서 보석사기 당한 동지잖아요. 참, 희정 누나 지금 리마에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좁다. 우리가 인도에서 만난 그녀를 선재는 방콕에서 만났고, 다시 선재와 우리는 페루에서 만나고 있다.
"그런데, 곰탕도 파는 건가요? 메뉴에는 없던데. 아내가 아파서."
"사장님이 드시려고 만든 거지만. 잠깐만요. 주방 아주머니께 부탁해볼게요."
때마침 나타난 남 사장님은 흰 쌀밥(남미에서는 밥을 할 때 기름을 넣는다) 한 그릇과 귀한 김치까지 덤으로 줬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날 아내는 뽀얀 곰탕 한 그릇에, 흰 쌀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먹고 나더니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산병과 곰탕. 무슨 의학논문이라도 써볼까 보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숙소를 옮겼다. '아리랑 식당'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6월의 쿠스코는 비수기였다. 하루 종일 식당 손님이라곤 한두 명. 광장에 나가 한국인이나 일본인 관광객을 잡아(?)오는 삐끼 짓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우리가 다 걱정이었다.
선재와 셋이서 피삭의 우루밤바 강으로 낚시 갔다 온 날이었다. 그날도 남 사장님은 이른 오후부터 혼자 술을 들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내가 말했다.
"사장님 술을 좀 많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왜,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자네가 맥주 한 잔 산다면 내가 삼겹살을 내오지. 어떤가?"
"우와, 삼겹살이 다 있어요?"
얼마 만에 먹는 삼겹살인가. 주방 아주머니는 맥주를 사러가고 선재는 삼겹살 구울 준비를 했다. 아내와 나는 사장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등 뒤에는 여기를 다녀간 사람들의 낙서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장님과 함께 먹은 세비체(페루와 볼리비아식 생선회)와 삼겹살이 맛있었다는 내용과 건강을 생각해서 술을 좀 줄이시라는 당부가 많았다. 내가 물었다.
"사장님, 국회의원도 많이 다녀갔네요."
"그럼! 쿠스코에 한국인 가이드는 나 밖에 없으니까. 자네, 그 놈들 여기 와서 제일 먼저 찾는 게 뭔지 알아? 여자야. 여자. 내가 그 시간에 여자를 어디서 구해? 그래도 국회의원이 까라면 까야지! 영계로 구해주잖아? 다음날은 아주 죽는 거지. 지까지 것들이 대수야? 고소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그 짓을 했으니 죽을 밖에!"
구슬픈 아리랑 노래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적은 글도 있군요!"
"그럼! 다녀갔지!… 근데, 사실은, 그거 내가 쓴 거야. 기념으로 한 자 쓰시라고 부탁했더니, 제자인가가 '우리 선생님께서는 붓과 벼루가 없으면 글씨를 쓰지 않습니다.' 이러더라고. 그래서 그치들 가자말자 내가 대신 써버렸지. 뭐 잘못됐어?"
벌써 얼굴이 불콰해진 남 사장님, 목소리 톤이 좀 커졌다.
"내가 이래보여도 옛날에는 촉망받는 축구선수였다고. 할레루야 팀이라고 알어? 근데 자네 나이가 몇이라고? 뭐, 서른 몇? 으응. 그래. 자네 정도는 알겠군. 그 땐, 최고의 프로팀이었어. 그럼 뭐해. 감독이 날 한 번도 경기에 내보내지 않는 거야. 왜? 돈을 안 찔러주니까. 나쁜 놈들. 한국 축구의 문제가 뭔지 알어? 바로 그거야. 내 더러워서 한국을 뜨기로 했지. 나, 남승학이, 떠나는 날 공항 로비에다가 오줌 싸버리고 왔다고. '내 다시는 이놈의 땅에 안돌아온다' 그런 마음으로 비행길 탔다니까!"
"그러면 그 때부터 귀국하지 않고 페루에 사신 건가요?"
"아니, 처음에는 몇 달 남미를 여행했지. 그러다가 파라과이에 정착했잖어. 그날 이후 내 안 해본 일이 없어. 심지어 붕어빵 있지? 그 기계를 한국에서 들여와 돈 좀 벌기도 했지. 나도 한 때는 돈 꽤 벌었었어. 그 놈의 엘도라도만 아니었어도…."
"엘도라도라구요?"
"그래, 엘도라도 몰라? 황금! 사금 캐겠다고 포크 레인 몇 대 사고 그랬어. 몇 년을 미쳐서 돌아다녔지. 자넨 모르지? 여기 쿠스코에도 집집마다 금 덩어리 하나씩 다 있어. 저 주방 아줌마도 집에 큼직한 거 하나 숨기고 있어."
"정말이에요?"
"다 부질 없는 짓이지. 그런데 자넨 한국에서 뭐 했나?"
"아 예, 저는 민주노총에서 일했구요, 아내는 사회당이라고 작은 진보정당에서 일했습니다."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구만. 참, 민주노총 부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비리로 구속됐다고 난리던데, 그 사람 아나? 그런 일 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그건 그렇고, 돌아가서는 뭐 할 건가? 만약에 정치하실 거면 우리 같은 사람들,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 잊지 말라고. 여기 나와 있는 사람들? 다 애국자야. 메이드인코리아, 그 거만 붙어있으면 가격 따윈 보지도 않고 그거 집는 사람들이야!"
"예에. 정치는 모르겠고, 저희가 책을 내면 꼭 쓰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국적은 어떻게 되어있나요? 페루 시민권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페루? 이 따위 나라 국민해서 뭐 할라고! …사실, 난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거지. 한국 놈도 아니고 페루 놈도 아닌… 잡종인거지!"
모국을 등지고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치고 사연 하나 없는 이가 있을까만, '아리랑 식당'에서 듣는 그의 이야기는 구슬펐다. 아리랑 노래처럼.
어느새 식탁에는 '잉카'표 맥주병이 우수수 쌓였다. 몇 점 남은 삼겹살은 기름이 빠져 딱딱해졌다. 남 사장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잡종이라던 그의 마지막 말이 식탁 위를 굴러다니다 내 이마를 콕콕 찔렀다. 그리고 해가 졌다. 주방아줌마가 퇴근했다. 오늘도 역시 손님은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아내인 김향미씨와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