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7월 16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 시간.
당시 천용택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들과 이양호 국방장관이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천 의원은 "4·11 총선이 끝난 뒤 북한 경비정이 서해(북방한계선·NLL)를 침범했지만, 우리 군은 '훈련중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며 오히려 북한을 두둔하고 있다"고 따졌다.
이 장관은 "북괴 함정이 서해(NLL)를 넘어온 것은 정전 협정 위반이 아니다"라면서 "NLL은 우리 어선이 북쪽에 너무 가깝게 가면 잡혀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넘어가지 말라고 공해상에 우리가 그어 놓은 선"이라고 답했다.
천 의원이 "장관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며 발끈했고 야당의원들의 반발로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화가 난 이 장관은 "엄밀히 말하면 그것(NLL)은 공해상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선"이라며 "이것은 정전협정하고 상관없다, 넘어와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장내는 더 시끌시끌해졌다. 야당 의원들은 "그럼 북한 함정이 NLL 넘어와도 괜찮다는 말이냐"라고 소리쳤다. 이 장관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넘어와도 괜찮다"고 몇 번 반복해 맞받아쳤다. 김수한 국회의장이 서둘러 대정부 질의응답 종결을 선언하지 않았다면 양쪽은 더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장관 발언 파문은 며칠간 계속됐는데 당시 정동영 국민회의 대변인은 "정부는 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한 국방장관의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장관을 즉각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런데 당시 7월 17일 <조선일보>는 '합의된 선 없어 논란 무의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NLL은 연합사가 1953년 8월 30일 임의로 설정한 것으로 이 국방장관이 NLL 침범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는 것"이라고 썼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이 사건 관련자들의 입장은 정반대가 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53년 휴전협정 때 육상 경계선은 명확하게 확정됐는데 해상경계선은 모호했다. 같은 해 8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사령관이 남한 선박이 북쪽으로 너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해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 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에 중간선을 그었는데 이게 NLL이다.
공수 뒤바뀐 여야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주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적 신뢰 구축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가 NLL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4대 근본문제에도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 등에 대한 남한 주민의 참관 금지 등과 함께 NLL 문제가 들어있다.
특히 NLL은 남북 경협 확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남북 철도 상시 운행, 개성공단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관 문제 해결, 한강 하구 공동개발은 모두 군사적 안전 보장이 필수적이다. 해당 지역이 모두 군사분계선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주장하는 남북경제공동체 형성의 전제가 NLL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연철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는 8일 코리아연구원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은 군사적 보장이 필요한 경제협력 사업을 해상경계선 문제와 연계하고 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도 경제협력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끈질기게 서해 경계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남한으로서는 서해교전과 연평해전까지 벌어지면서 NLL은 영토 문제이자 보혁 대결의 첨예한 사안이 돼버렸다.
지난 7월 말 6차 장성급 회담도 NLL 문제로 결렬됐다. 따라서 북한은 실무자급 회담에서 별 성과가 없었으니 정상들의 만남에서 NLL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리자고 남쪽을 압박할 수 있다. 이 경우 NLL은 정상회담의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은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NLL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며 "그러나 한국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논의가 필요하다는 수준에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군사 분야에서의 성과를 못내면 별 의미가 없다"며 "평화체제를 논의할 것인데 지금보다는 나아져야 한다, 성과를 꼭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NLL 문제를 꺼낼 수 있겠지만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며 "북한이 비핵화를 하고 군비 통제 차원의 협력까지 한다면 NLL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한다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재진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 소장은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한 정상이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이익을 얻는데 목적이 있다"며 "따라서 실무적인 차원에서 논의해야 하고, 더구나 남한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NLL문제를 북한이 제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설사 NLL 문제를 제기해도 남한 정부 입장에서 워낙 예민하기 때문에 원론적인 언급에 그칠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양쪽 이미 사전 교감?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상 회담 시기의 미묘함 등을 들어 한국 정부가 NLL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이미 북한에 전달한 것이 아닌가하는 관측도 한다.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남쪽이 7월 초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의 고위급 회담을 제안했고, 7월 29일, 북한은 8월 2~3일 국정원장이 비공개로 방북해줄 것을 공식 초청했다. 그리고 8월 5일, 2차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그런데 7월 초 북한은 6차 장성급 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7월 16일 실무회담에서 7월 24~26일 6차 장성급 회담 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6차 장성급 회담은 북한이 NLL문제를 제기하면서 결렬됐다.
6차 장성급 회담이 결렬된 직후 남북 관계가 대단히 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7월 초에 남북 장관급 회담을 조기에 열자고 제안했었는데도 북한은 3주 동안 답변이 없었다.
그런데 북한은 뜻밖에도 7월 29일 김만복 원장을 초청했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이런 정황으로 볼 때 6차 장성급 회담 결렬 뒤 남쪽에서 NLL문제 등에 대해 변화된 입장이 북한에 전달됐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여 국정원장을 초청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남쪽이 NLL 경계선 자체는 아예 논의하지 않되, 공동어로 수역 설정이나 해주항으로의 북한 선박 직항 문제는 풀어 줄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정상회담 때 합의하되 공식 발표는 하지 않고, 이후 남북 국방장관급 회담에서 마무리 짓는 형식을 취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 대북문제 전문가는 "NLL문제에 국민의 감정이 끼어있어서 그렇지 풀려면 풀 수 있다"며 "현재 남측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NLL선은 그대로 유지하되 공동 어로수역 설정에 있어서 남쪽 정부가 유연성을 발휘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외부에 노출될 때는 항상 통 크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회담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한 것이 한 예"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따라서 국군 포로나 납북자 문제도 의외의 성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주한 미군과 한미합동군사 훈련 문제를 거론할 수 있으나 이는 북미 관계의 진전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인 만큼 NLL보다는 폭발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