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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려한 휴가>의 포스터
ⓒ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 본 사람~! 어땠는지 말 해줘봐."
"왜 봐, 그걸."
"내 휴가도 없삼."
"<라따뚜이> 보러가자^-^"
"왜 갑자기 진지모드냐."
"그건 뭔 영화? 심형래꺼나 보러가자."


인턴동기들과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러 가기 전, 믿음직한 녀석의 추천 하나만 있으면 보기 싫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해질까 싶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 그들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하여튼 무식한 이공계생들'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언제나처럼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언니, 저 혼자 저거 보면 안 되나요?"

종로 단성사 앞에서까지 나는 영화 <라따뚜이>의 포스터를 보며 생떼를 썼다. 인턴동기들의 단체관람이기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포스터 속의 생쥐는 나를 애타게 쳐다보고 있었다.

졸지 않으려고 평소 잘 마시지 않는 커피를 사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 1시에 시작한 심야영화 <알렉산더>를 제외하고 다행히 스크린 앞에서 잠든 이력은 없는 나인 터라, 칭얼대던 내 머리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민우(김상경 분)와 신애(이요원 분), 진우(이준기 분)가 이주일 주연의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공수부대와 전경들이 던진 최루탄 연기가 영화관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사람들이 놀라 대피하자 군인들은 그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내 상상 이상이었다. '퍽, 퍽!'하는 몽둥이 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소리 크기가 세질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저렇게 때릴 수가! 인턴 동기 언니, 오빠들은 나처럼 깜짝깜짝 놀라지는 않는 듯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라는 이야기에 나는 홈에버 상암점에서 일어났던 비정규직 투쟁 정도를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실 상암점 투쟁도 충격이었는데, 스크린을 통해 보는 폭력은 믿기지 않았다.

'영화라서 과장한 것일 거야. 아니야, 설마 우리끼리 저랬겠어? 감독님 과장도 심하시네'라고 계속 되뇌며 영화를 봤지만,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임산부의 배를 찌르고 여대생을 성폭행하는 등 여성들을 탄압한 실제 이야기는 왜 생략했는지 모르겠다"는 한내 언니의 말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상필이의 죽음, 온몸에 소름끼치다

▲ 영화의 한 장면. 공수가 쏜 총탄에 시민들이 쓰러져나갔다.
ⓒ 기획시대
"상필이가 죽었대! 공수놈들한테 맞아죽었대."

고등학생인 진우 친구 상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들은 한동안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충격과 동시에, 그래도 그 영상이 뉴스가 아니고 영화라 그런지 퍼뜩 다른 생각도 든다. '이런 현실을 모르고 <라따뚜이>를 보러 가자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니'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그것이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광주시민의 움직임이 거세지자, 공수부대는 "5월 21일 정오에 계엄군을 철수한다"고 방송으로 알렸다. 약속한 정오 5분 전, 시민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군인들을 향해 10보 전진했다. 정오가 되자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군인들은 갑자기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군인들이 쏘아대는 총탄에 앞줄에 있던 시민부터 쓰러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수위 높은 장면들이 심해질수록 내 피부도 적응했는지 더 이상 소름이 돋아나지도 않았다.

민우 동생 진우도 군인의 총탄에 맞고 입에서 피를 토한다.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진우는 끝내 죽고, 민우는 그때부터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처럼 미쳐버린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이 장동건만의 동생이라면, 영화 <화려한 휴가>의 진우는 '민우만의 동생'이 아니다. 진우는 '모두의 동생'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은 혼자 정신이 나가 전쟁에서 북한군이 된 것으로 그치지만 진우의 죽음을 보고 정신이 나간 '민우'들이 모여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킨 것이기에 이 둘은 의미가 다른 것이다. 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르던 사람들도 동생뻘인 동네 대학생들의 죽음을 보고 분개하여 운동에 참여했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민우를 죽이려는 군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신애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보며 넋이 나가 한마디 한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라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를 죽이러 오는 꿈이나 소복 입은 귀신 꿈, 우리집 거실만한 괴물이 나오는 꿈을 꾸면서 나는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귀신 꿈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신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는 환자들을 간호했지만 한순간 시뻘건 피로 물들어버린 그녀의 손. 그녀는 그런 현실이 믿기기는 했을지 궁금했다.

영화는 민우와 신애의 결혼장면으로 끝난다. 죽은 민우와 신애의 아버지, 눈먼 나주댁과 그녀아들도 환하게 웃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인 것이다. 하지만 신애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슬픈 표정이다.

이런 환상 장면은 영화 <괴물>과 <사랑해 말순씨>에서 본 기억이 있다. 영화 <괴물>에서 가족들이 모여 김밥과 컵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괴물에게 잡혀간 딸 현서가 어디선가 나타나 식사를 함께 한다.

영화 <사랑해 말순씨>에서도 말순은 결핵으로 죽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아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춘다. 이루어지지 못한 결말에 대한 관객들의 아쉬움을 환상으로나마 채워주기 위해 감독들은 이런 장면을 넣는 것이리라.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이 <괴물>이나 <사랑해 말순씨>와 다른 점이 있다면, 관객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 모두가 그 '환상'을 바랐다는 것이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도 광주시민들도 매일 밤 쉽게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 <화려한 휴가>
ⓒ 기획시대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부탁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처럼 광주 민주화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 그리고 10대들이 보기에 사건의 전후 상황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광주시민과 군인들의 대립이 보일 뿐, 그 대립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광주시민들이 왜 분개하며 군대는 왜 그들을 진압하는지 영화 내내 궁금했다. 물론 그 답은 한마디 문장으로 끝날만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시작 전이나 후에 중요 내용을 자막처리만 했더라도 좀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22살이나 먹은 대학교 3학년 학생이 학창시절에 무슨 짓을 했길래 자막설명이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어른들도 계실 것이다. '하여튼 요즘 아이들은 관심이 없어, 쯧쯧'하며 혀를 차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전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몇 줄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을 전혀 전달하지 못한다.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을 보여줬을 때 나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5월 18일" 하면 "친한 친구 생일"을 떠올리는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부탁한다.

포털 검색창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한 번만 검색하고 읽어보라고. 그리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라고.

태그:#화려한 휴가, #518, #광주,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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