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는 물 같다더니, 멀기만 해 보였던 1년이란 시간이 그야말로 눈 깜박하는 사이에 다 지나가고 있다. 이제 귀국하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더구나 뉴욕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보고서 제출 마감시한에 쫓겨 이번 주 내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디 한 군데는 더 가보고 싶어서 희영씨와 정연씨를 불러내었다.
1년여의 뉴욕 생활 마지막에 찾아 가려고 마음먹은 곳은 월스트리트(Wall street)였다. 2000년 유엔에서 밀레니엄 포럼이 열릴 때 뉴욕에 와보고 이번 방문으로 뉴욕은 두 번째이다. 처음 뉴욕에 와서 월스트리트를 찾았을 때는 휴일이어서 월가의 금융가는 다 문을 닫고 있을 때였다.
사실 지난 번 이민자의 날 행사가 월스트리트 앞의 배터리 파크에서 열려서 가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행렬을 따라 가며 사진 찍다 보니 '다음에 오지'하는 생각에 미루어 두었는데, 결국 미국 생활 막바지에 가게 되는 셈이다.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의 배경?
월스트리트는 맨하탄 끝이니 전철로 제법 가야 한다. 집에서 가다 보면 중간에 한 번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월가가 가까워 오니까 전철 안의 풍경이 바뀐다. 이 무더위에 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월스트리트 역에서 내린다.
이 곳은 '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은 식민지 소유권 분쟁이었다. 이곳에 살던 인디언들을 다 쫓아내고 초기 맨하탄을 지배했던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식민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면서 이 곳에 거대한 목책을 건설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들이 인디언을 쫓아내고 학살했던 그 장소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 앞에서 월 스트리트 쪽으로 걷다 보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황소상이 하나 등장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황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황소만 온전히 찍기가 어려울 정도.
이 황소는 왜 여기 서 있을까? 황소 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주식 투자에서 황소는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곰은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의미한단다.
희영씨는 케인즈의 일반경제이론에 주식시장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황소같다"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서 따온 것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담아서 만든 상징물인 셈이다.
돈으로 돈을 버는 '세계화의 첨병'
여러 은행과 투자사들이 월스트리트의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 IMF와 함께 우리가 들었음 직한 이런저런 투자사들의 이름이 걸린 빌딩들이 눈에 띈다.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지구 곳곳에 수익이 나는 곳이면 어디든 들락거리면서 돈으로 돈을 벌고 있는 회사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다.
이런 금융사들 사이에 서 있는 런던·도쿄와 함께 세계 3대 증권거래소의 하나인 뉴욕증권거래소는 1817년에 설립됐다. 세계 최대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고, 미국 전체 증권 거래액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거래소 입구에서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나오고 들어가고 한다.
계명대 경제학과 김영철 교수에 의하면 이 곳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국제결제은행이 추계한 일일 평균 순외환거래 규모의 경우 명목달러 환율을 기준으로 2004년 일일 평균 '전통적' 외환거래규모는 1.9조달러로서 1992년에 비해 223%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전통적 외환거래보다는 장외파생상품거래의 증가속도가 매우 빠르다. 2004년 장외파생상품거래는 1992년에 비해 무려 20배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간 영업일을 250일로 가정할 경우 2004년 연간 '전통적' 외환거래규모는 470조달러이고 장외파생상품거래 규모는 300조달러로 전체 규모는 770조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IMF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연간 수출액은 7.4조달러이다. 이렇게 볼 때 연간 전세계 외환거래규모는 연간 전세계 수출액의 100배를 초과한다. 말하자면 이는 2004년 중 연간 외환거래액의 99%는 무역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거래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일일 국제외환거래액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세계외환보유 4대 국가의 총외환보유고 합계인 1.9조달러보다 그 규모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외환거래규모는 전세계 연간 총생산규모인 30조달러에 비해서 16배 이상의 규모이다." - (한국사회경제학회 학술대회/97년체제 극복과 투기자본의 문제: 토빈세를 중심으로)
연간 외환거래액의 99%가 무역활동과 관련 없는 거래라는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이 투자하거나 빌려주고 그 대가로 수익을 챙기는 돈일 것이다.
동남아 각국과 우리가 겪었던 90년대 말의 외환위기의 중심에 이같은 금융자본이 있었던 셈이다. 그 중에 많은 부분이 미국민들 스스로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이 곳 월스트리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저돌적인 황소상에 대한 단상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내의 대출에 관한 것처럼 보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 금융이 세계 금융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세계공황으로 이어지기도 한 것처럼 월스트리트의 성쇠는 세계 금융시장의 성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월스트리트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인간성이라고는 없는 냉혹한 금융자본의 본거지에 자리 잡은 저돌적인 황소상. 그것은 개인투자자들의 낙관적 행태로 읽히기보다는 자기 이윤의 끝조차 모르고 있는 이 곳 금융자본가들의 폭력적 행태로 읽힌다.
내가 과도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뉴욕증권거래소에 걸려 있는 거대한 성조기는 금융자본을 매개로 한 신자유주의의 확산이 미국식 제도의 확산임을 상징하는 코드처럼 읽혀져 더 씁쓸하게 다가왔다.
운동의 상업화일까, 시장의 대안일까
차이나타운과 소호를 가로질러 뉴욕대 앞까지 가서 잠시 목을 축이러 들른 곳은 싱크커피(think coffee) 상호를 달고 있는 페어 트레이드(fair trade) 카페.
아담하고 아늑하고 조금은 투박한 분위기의 카페 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공간도 크고, 거기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 그리고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카페에 가득 찬 대부분의 손님들이 책을 들고 있거나 애플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뉴욕대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 곳에는 스타벅스에 대한 반감이 존재한다고 그러던데…. 이런 커피 시장의 빈 공간을 노린 것은 아닐까?
하긴 페어트레이드 카페들이 이윤 추구보다는 '운동'만 생각한다면 대안 무역 영역이 확대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도 상업적으로도 성공해야 지속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초의 기대'를 배반한 카페에 그리 정이 가지는 않았다. 운동도 상업화되어버린 느낌이 들어서일까?
그래도, 월스트리트가 갖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상징성에 대비할 만큼의 진한 운동성이 풍기지는 않지만 페어트레이드 카페에 손님이 넘쳐난다는 것의 의미를 굳이 축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각국의 경쟁력 없는 산업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구축된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이다.
이에 대한 도전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대안무역인데, 그저 선의로 '페어트레이드 카페의 것을 마셔야지'라는 차원을 넘어서 싱크커피라는 브랜드로 발전해 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안무역이 시장에서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농 제품처럼 시장에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한 위치로 자리잡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한계를 지니고는 있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중심인 뉴욕 한복판에 페어트레이드를 주창하는 카페가 성업하고 있는 것이 상징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문화코드의 하나인 다양성을 말해주는 사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운동'적 분위기를 기대했다가 되레 상업적 분위기에 압도된 우리는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