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 기자] 2000대 1에 육박하는 아나운서 입사 경쟁률. 대학가와 아나운서 아카데미가 밀집한 이대, 신촌 일대는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지망생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입사 면접 1분을 위해 들이는 비용은 이런저런 꾸미는 데 드는 비용과 사진 촬영비를 합해 평균 100만원이고, 다달이 학원비며 각종 품위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은 월 100만원 안팎의 고액이다.
일부 유명 방송인이 차린 아카데미는 월 200만원의 코칭비를 받기도 한다. 준비 기간이 평균 2년인 것을 고려해 계산하면 3000만~40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드는 셈이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꿈을 이루기 위한 투자인데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이크를 잡는 일 외에 다른 일은 아직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이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방송국 입사시험을 준비하는 김원미(가명·23)씨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이유를 '노출증'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아나운서 준비생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노출증이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나를 봐주길 원하고 내게 관심이 집중됐으면 좋겠고…. 그런 걸 즐기는 거죠. 물론 방송을 진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장점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예요"
또 다른 준비생인 하진미(가명·24)씨는 여자로서 그나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언론 권력이라고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적잖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매력 있어요."
전문직 여성으로 인정받으면서 일정 부분 대중에게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아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하는 듯했다.
아나운서 아카데미 관계자들은 아나운서 모집이 매년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낳을 정도로 아나운서 열풍이 거세다 보니 거품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남성은 정말 말하는 데 재능이 있고,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지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성은 미스코리아 대회 등 미인 대회의 인기가 과거에 비해 시들해지면서 외모에 자신 있는 여성들이 미인 대회 대신 아나운서 응시로 방향을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 더욱이 방송사들이 1차 시험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도입한 뒤 외모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망생들은 단순히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나 방송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덤비면 중도에 탈락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도박이거든요. 바늘구멍처럼 좁은 그 문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을 준비해요. 재능과 열정이 없으면 그 도박을 계속 하기 힘들죠. 1년도 준비 안 한 누가 됐더라, 반면 누구는 이번에도 또 떨어졌더라, 올해는 경쟁률이 2000 대 1이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며칠 동안 방 안에서 쓰러져 있기도 해요. 얼마나 좌절과 고통이 심한 길인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외모 비중 커져 '보여주기식' 우려도
이들이 아나운서 시험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껏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노력했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는데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이들의 답변이다. 물론 준비하면서 생긴 오기와 집착도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한 아나운서 지망생은 자신을 불나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죽을 걸 알면서도 불길을 향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용감하리만큼 무모한 불나방이지만 불나방에게 그 불구덩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아나운서 준비 과정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중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즐거운 중독'인지 '위험한 중독'인지 묻는 질문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나운서를 희망하는 이들이 매년 증가하면서 아카데미에 이어 아나운서 공부방도 등장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8월 7일 오전 10시, 신촌에 위치한 아나운서 공부방인 'MOC'(www.masterof.co.kr)에선 곱게 단장한 여성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발성 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이 공부방을 이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수료했기 때문이다. 보통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데 1~3년 이상 걸리는데 아카데미를 여러 차례 수료하기엔 재정적인 부담도 만만찮고 시간적인 효율성도 떨어진다. 반면 공부방에서는 10만원 안팎의 비용만 내면 모임을 만들어서 팀별로 공부도 하고, 선배 지망생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공부방을 운영하는 윤상필(28)씨는 공부방에 도착한 뒤 목을 풀고, 뉴스 대본을 읽는 회원들의 모니터를 지켜보며 부족한 부분을 지적했다.
"자. 봐봐, 12시 현재 '시간'이 아니라 '시각'이잖아. 단어 자체가 틀렸어. 실전에서 이렇게 하면 끝장인 거 알지. 다시 해보자."
마이크, 카메라, 노트북 등이 설치된 다른 방에서는 두 명의 남녀 아나운서 지망생이 인터넷 방송을 실제로 진행하고 있었다. 학력 위조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고, 직접 발라드 음악을 선곡해 틀어주기도 했다. 실제 방송을 진행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는 이들은 초보 방송인이라고 하기엔 노련함이 넘쳤다. 마이크를 잡는 일 자체에 상상할 수 없는 환희와 설렘이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그 때문일까. 한번 마이크를 잡아본 이들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 공사 등에 취업해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아나운서 준비에 나서는 이른바 아나운서 시험 삼수, 사수생들도 적지 않다는 것. 최근엔 나이 제한이 사실상 철폐되면서 마지막 도전을 감행하는 20대 후반의 '돌아온 지망생'들까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아나운서 폐인'이 늘어나는 원인을 외모 중심의 사회현상에서 찾는다. 동의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김명혜 교수는 "과거 라디오 시대에는 외모보다는 발성이 중요했지만 TV 시대에는 비디오형 아나운서가 각광받을 수밖에 없는데, 아나운서 지망생들 역시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자신의 외모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잣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며 "방송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아나운서가 아니라도 기자, PD, 작가 등의 직업군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아나운서만 고집하는 것은 무엇보다 보여주기에 가치를 두는 젊은 세대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로 풀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 겉모습만 좇다간 빛 좋은 개살구...'열정·재능' 갖춰야 | | | [인터뷰] 정하나 국제행사 전문 진행자·전 아나운서 | | | |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4개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로 일한 경력이 있는 정하나씨(사진)는 현재 국제행사 전문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방송국 아나운서실 소속 직원이었던 그가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좀 더 '주도적인 삶'을 꿈꾼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TV에 아나운서 얼굴만 보이니까 아나운서가 중추적인 구실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방송국 내에서 아나운서는 보조자에 그칠 때가 많아요. 연출자와 작가들이 프로그램 방향키를 쥐고 있거든요."
지방 방송사에서는 공중파라 하더라도 아나운서를 2년 계약직으로 뽑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결혼을 하거나 아나운서 양성 기관의 강사 등으로 활동한다는 것.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 좇다간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다행히 정씨는 진로를 바꿔야 할 시기에 문화행사 통역 경험을 살려, 2005 세계평화축전 폐막식과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개, 폐막식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을 맡으며 성공적으로 전직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아나운서 시험에 목매는 후배들을 보면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준비된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죠. 많은 아나운서 준비생들이 시험 당일에 메이크업, 헤어, 의상 등에 초점을 맞추는데, 정작 합격을 결정짓는 건 눈동자 움직임, 표정, 말투, 목소리 떨림 등의 요소예요. 얼마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해왔는지는 의상이 아니라 그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에서 나타나는 거니까요."
왜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지, 또 아나운서가 된 이후에는 어떤 아나운서가 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꿈꿔왔던 분홍빛 미래는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의 핵심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