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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앞 전경.
미술관 앞 전경. ⓒ 하승창

1년여의 뉴욕생활을 마감하고 LA로 옮겨왔다. 귀국하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기도 하고, 서부 쪽에 사는 지인들 몇 사람을 만나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유병진 선배 집에 짐을 풀었다. 함께 노동운동을 했고, 경실련에도 잠시 함께 있었는데, 90년대 중반에 훌쩍 미국으로 건너 와 버렸다.

유 선배는 10여년이 넘도록 고생하다가 최근에 자리잡기 시작했단다. 밤새 웃으며 지난 이야기를 말하고 듣지만 이민자가 겪는 고생이 어디 웃음으로 넘어갈만한 일이겠는가? 이제 웃으며 이야기할 지난날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LA에 오기 전에 가게 되면 폴 게티 미술관에 가보라는 '추천'을 받았던지라, 유병진 선배가 출근하는 길에 그 차를 얻어 타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조금 높은 산 위에 자리한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는 트램웨이(tramway 두상궤도(頭上軌道), 와이어 로프(wire rope), 케이블 따위의 위로, 바퀴가 달린 차가 짐을 실어 나르는 장치)라고 불리는 이동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미술관에 들어서기까지 난 폴 게티(J. Paul Getty)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개인이 미술관을 짓도록 기부를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둘러보았다.

미술관 전체가 '미술품'

미술관 안에서 안내원들이 열정적으로 미술품에 대해 설명한다
미술관 안에서 안내원들이 열정적으로 미술품에 대해 설명한다 ⓒ 하승창
5개의 잘 지어진 건물 내부에 각종 유물과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미국 내 유명한 미술관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른 미술관들과 달리 독특한 것은 건물과 미술관 옆의 정원이었다.

폴 게티 미술관이 설립된 것은 자신의 집에 미술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1954년이라고 한다. 지금의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선 것은 1983년. 폴 게티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폴게티 트러스트에서 산타모니카 산맥의 산기슭에 거의 100만평에 이르는 공간을 구입하면서부터이다. 미술관이 이처럼 좀 높은 곳에 있고, 건물의 통로나 연결지점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미술관 외부의 조경이나 도심을 내려다 보는 전망도 괜찮은 곳이다.

리처드 마이어라는 건축가가 미술관을 포함한 게티센타 전체를 디자인했고, 폴게티 미술관의 또다른 볼거리인 정원은 미술가인 로버트 어원이라는 사람의 작품이다. 미술관 내부의 작품 뿐 아니라 미술관과 그 부대시설 모두가 '작품'인 셈이다.

그 작품 속에서 사람들은 감상과 여유를 함께 만끽한다. 전체가 잘 꾸며진 공간인 셈이다. 미술관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도록 몰입하게 하는 것은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억에 남는 것이 미술관 안의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 자체가 되어버렸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론 작품들이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학교 미술 시간에 인상파 화가의 대가라고 배웠던 마네(Manet)가 그린 그림, 폴리제르베르 바(A Bar at the Folies-Bergere) 한 점만을 따로 한 방에 걸어 놓고 반대편 벽에는 거울을 걸어 놓고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의 초점이 달리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은 인상적이었다.

작품 앞 곳곳에서는 직원들이나 자원활동가들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두드러진다. 하여간, 지금껏 몇 안되지만 다녀 본 미술관들과는 느낌이 다른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얼마나 부자였길래...

시원하게 확트인 전망.
시원하게 확트인 전망. ⓒ 하승창

그런데 이 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도대체 폴 게티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걸 다 기부할 수 있었을까? 혹 자치단체가 시민들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미술관의 안내 자료를 보면 이 미술관은 전적으로 폴게티 트러스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폴게티 트러스트는 미술관 뿐 아니라 연구소, 재단 등 여러 산하기관을 두고 있기도 하다. 결국 폴 게티의 기부금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고 있는 미술관인 셈이다.

폴 게티는 미국 대공황이후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지금은 사라진 게티 석유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고 석유 사업으로 돈을 벌어 5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명단의 첫 머리를 장식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져 있고, 자기 재산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기도 해서 자신이 사들인 미술품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악덕기업가이기도 하고 방탕한 사생활로 5번이나 결혼했지만 가족들과의 불화도 심해서 아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생전 '악명의 대명사'... 죽어서 이미지를 바꾸는 사람

나는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플레이보이지에 연재하고 책으로 출판된 '부자가 되는 법'은 유명하다고 한다. 주식시장에서 널리 알려진, "모든 사람들이 매도할 때 매수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매수할 때까지 보유하라. 이것이 바로 성공투자의 비결이다"라는 말이 이 책에 나오는 구절인 모양이다. 실제 그는 투자의 천재라고도 알려져 있을 정도로 돈 버는 데는 뛰어났지만 1976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방탕하고 비정하며 악덕한 기업가였다.

그런 그가 죽으면서 사회에 기부한 막대한 기부금이 오늘의 게티 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의 기초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공짜로 그가 남긴 미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벌어들이는 과정도 탐욕스럽고, 그렇게 벌어들인 재산에 대한 집착도 강한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혈육들에게 독점적으로 재산을 사용하도록 상속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 이런 비정상적인 모습을 접하다가 이렇게 사후에라도 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겠는가? 폴 게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에서 뒤져 보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폴 게티라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돈을 기부했구나,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개는 폴게티 미술관을 다녀가는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폴게티를 악독한 기업가로 기억하기 보다는 공짜로 좋은 작품들을 감상하게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을 제공해 준 사람으로 기억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악독한 자본가로 돈을 벌어들인 과정에 대한 갑작스런 반성이 막대한 기부금으로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정이야 어떻든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사회의 재산으로 남기면서 악명의 대명사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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