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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자서전 <절말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 위즈덤하우스
그녀는 너무 예뻤다?

부드러운 조명의 흑백 사진, 그는 수줍은 듯 웃고 있다. 입꼬리만 살짝 올린, 특유의 웃음이다. 둥글게 말아올린 속눈썹, 렌즈를 착용한 눈동자가 유난히 또렷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도무지 책장을 넘기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잠깐. '원빈' 사진도 1분이면 질리는 내가 아닌가. 사실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손에 들린 책이 박근혜 전 대표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인 까닭이다. 제목만큼이나 긴 한숨이 나온다.

'화려한 약력'이 내용의 전부다

용기를 내 책장을 넘기자, 이름 석자 아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책장 앞 뒤 날개에 빼곡한 저자의 약력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의 기를 단번에 꺾는다.

10대 자연스레 국가 운영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20대 늦은 밤까지 공부와 실험에 빠져 살다 미팅 한번 못했다.
30대 거친 오해와 비판이 계속되는 차가운 현실에 맞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40대 나라를 반석위에 세우는데 일조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해 소신의 정치를 실천했다.
50대 국내 정당사 최초 당대표 임기를 완수한 영광을 얻었다.

정치인으로서, 그것도 한 나라의 지도자를 꿈꾸는 이로서, 이렇게 '정석(定石)' 같은 인생이 또 있을까.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안되면 누가하랴?' 의문스러울 정도다.

인생 1막의 '유서' 같은 책이라지만

360여장에 가까운 자서전은 "두 번째 삶을 시작하며"라는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2006년 5월 20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서울 시장 후보 지원 유세 중 괴한에 의해 피습을 당한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상처가 5밀리미터만 깊었어도 '즉사'로 이어질 대형 사고였다고.

"피습사건을 겪은 뒤, 이제부터 남은 인생은 하늘이 내게 주신 덤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았기에 거둬갈 수 있었던 생명을 남겨둔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잃을 것도, 더 욕심낼 것도 없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의 삶은 2006년 5월에 1막을 내렸다."

저자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지난 삶을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기록을 시작했다. 그 인생 1막의 '유서'와도 같은 이 자서전을 '뻔하고 하품난다'고 말하게 돼 유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 전 대표의 자서전은 화려한 수식어의 약력에, 살을 붙인 것이 전부인 책이다.

'우상'이던 육영수, '로맨티스트' 박정희

저자는 책 전반부를 어린시절의 추억을 묘사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현모양처' 어머니에 '다정다감'한 아버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가정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부모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묵직한 '중량감'이다. 박 전 대표 역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삶을 흡수하며 자라왔다. 특히 어머니 고 육영수씨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부모님을 존경했지만, 특히 어머니는 나의 우상이었다. 매사 사려 깊고 부드러우며 확신에 찬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를 따르고 모방하면서 그렇게 사춘기를 맞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녀의 '교본'인 동시에 채 아물지 않은 '상처'다. 저자가 묘사하는 박정희는 '로맨티스트'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매도하고,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분노한다. 자신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대한민국' 이외의 사심은 없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시절에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도 계셨다. 나는 그분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왔다."

아버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부족한 면"이 있어서, "죄스러운 마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가 누구에게 죄스러워 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책을 통틀어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 언급인 것은 분명하다.

▲ 2006년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의 충북 옥천 생가를 방문한 박근혜씨.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연예인' 아니야? 플레카드에 적힌 "근혜야 울지마"

간간히 삽입된 사진 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람은 "근혜야 울지마"라는 피켓을 양손에 쥐어 든 아주머니였다. 이 사진을 흘려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정치인 '박근혜'를 보는 복잡한 시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자. "무현아 울지마", "명박아 울지마"가 어색하지 않은가? 그러나 "근혜야 울지마"는 괜찮다. 그녀는 '육영수 여사'를 꼭 닮았고, 양 부모를 총에 잃는 불행을 겪었으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의 자서전은 철저히 독자이자 유권자인 국민을 의식하고 쓰였다. 그러기에 '북치고 장구치듯' 자신의 경험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초점을 둔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연기가 어색하듯, 독자를 의식한 글쓰기는 '자서전'으로서의 가치에 의문을 갖게 한다. 정치에 무지한 나에게 이 책은, 한나라당이 출판했다는 <대국민 약속 실천백서>만큼 따분할 뿐이다.

조금만 더 '진솔한' 글이었더라면

책 읽기를 끝내니 괜히 마음이 허탈하다. '오늘이 있기까지 지탱해 준 국민들에게 감사하며, 이 책을 바친다'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입장이 난처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아무 느낌 없이 책 한권을 읽기는 처음인 까닭이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왜 대통령이 되려 할까? 그나저나 '조금만 더 진솔할 순 없었을까?' 괜한 투정이 혀끝을 맴돈다. 자서전 한 권을 다 읽었지만, 나는 '박근혜'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이 책이 책장 깊숙이 꽂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는 '명쾌한' 예감만 남아 있을 뿐.

태그:#박근혜,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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