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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큰 애의 학업유형을 가정학교라 하기에도 그렇고 스스로학교라 이름 붙이기도 애매합니다. ‘스스로 세상학교’라고 붙이면 적당할까요? 이름 가지고 또 복잡해진다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제가 ‘홈스쿨’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대안적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냥 쉽게 ‘홈스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이름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요.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관계가 반 이상 정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름이 잘못 붙었다 싶으면 저는 혼자서도 이름을 새로 붙여 부르곤 합니다.

바른 이름이 바른 관계의 출발점

대표적인 것이 ‘성인’이라는 말인데요. 이것은 대개 ‘음란’이나 ‘포르노’라고 붙여져야 할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인전용 극장이니, 성인오락실이니, 성인자료실이니 하는 게 모든 성인들을 음란물과 직접 연결 짓는다는 면에서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 못 쓰게.

‘지도층 인사’도 저는 ‘기득권층 인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제수준이 높은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라고 바꿔 써야 한다고 봅니다. ‘로드킬’은 ‘찻길살생’, ‘한글교실’은 ‘한국말교실’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주여성이나 이주 노동자들 대상으로 하는 ‘한글교실’은 사실 한국말 교실이지 한글 교실이 아니거든요. 한글은 한국어뿐 아니라 조선어, 고려인어 등이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이쯤 하고요.

우리 큰애가 자기 생활을 잘 관리하면서 만족스런 생활을 하는 것은 학교를 가는 것이나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 자기가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풀무학교 나오는 것을 제가 반대했었거든요. 풀무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 집에까지 오셔서 설득하기도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싹수가 좀 그랬긴 했습니다. 풀무학교 입학하기 전에 2박3일 동안 학부모·학생 공동으로 예비학교가 열렸었는데 저랑 같이 갔었거든요. 그런데 하룻밤 자고나서 나한테 그랬습니다. “애들이 어떻게 ‘실상사 작은학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이우학교’나 ‘하자센터’ 아는 아이들도 하나도 없다”며 아주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방에 있는 아이들이 계속 연예인 얘기만 하고 자기가 다닌 중학교 담임 흉만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1학기 말 쯤에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수학을 그렇게 좋아하고 잘 했는데 풀무 와서 문제만 푸는 수학을 하니 힘들다고 하고, 보수적인 기독신앙을 수업에 까지 연결시켜 창조론을 강변하는 몇몇 교사들의 견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실상사 작은학교 때와 사뭇 다른 풀무학교 분위기 자체를 저는 소중한 공부꺼리로 여기고 있는데 반해 큰 애는 시간 아깝다는 거였습니다. 사족을 답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풀무학교는 아주 훌륭한 학교입니다. 우리 아이의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그랬을 뿐입니다.

큰애 보다 작은애는 훨씬 일찍부터 더 많은 ‘스스로 세상학교’를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여러 모임이나 행사들에 놀기 삼아, 체험삼아 많이도 다녔습니다. 주로 제가 데리고 다니는 꼴이었는데 그래도 제일 많이 참석 한 곳이 가상공간을 축으로 하는 공동체 운동 조직인 ‘길동무(www.gildongmu.org)’에서 하는 ‘보따리학교’였던 것 같습니다.

길동무는 2002년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이 끝나고 후속 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제가 당시에 ‘사이버단장’을 맡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아이가 걷기에도 참석하면서 보따리학교의 주요 성원이 되었습니다.

부안핵폐기장 찬반 주민투표가 진행될 때 저랑 보따리학교 학생들이 같이 가서 자원봉사활동을 했습니다. 2004년 총선 때는 창원에 있는 방과 후 대안학교인 ‘하늘땅학교’에서 보따리학교를 열었는데 초등학생들이 포함된 수십 명의 보따리학교 아이들이 직접 후보들이 거리유세 하는 곳에 자원봉사자로 다니면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보따리학교‘의 추억

2005년 여름인가에는 경남 고성에서 1주일간 생명평화순례단이 되어 걷기를 했고 강원도 속초의 산골 농가에서 보따리학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기간, 우리 집에서도 보따리학교가 열렸지만 우리 아이는 거의 다른 지역의 보따리학교에 갔습니다.

그렇지만 교육기관으로서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대안학교가 두 아이의 성장과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입니다. 큰 아이가 풀무학교를 나올 수 있었던 힘도 따지고 보면 대안학교에서 키웠던 힘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잘 지내는 것도 풀무학교의 1년 공부가 여러모로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이들이 다녔던 그 학교를 소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고 생활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학습과 놀이를 축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대안학교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기 전에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된 내력을 먼저 말하는 게 순서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질문에 대답을 하고나면 십중팔구 이어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결정이 쉽더냐?”는 질문입니다.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결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질문자의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대안학교 선택이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내나 제가 사회운동을 해 왔고 부족하지만 대안적 삶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꾸준히 해 왔었기 때문에 생활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셈입니다.

그러니 갈등이나 망설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기존의 제도권 교육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반작용으로 대안학교와 대안 교육을 생각 해 보지만 그 순간 일종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방송통신대 대안교육연수 온라인 티브이 강의 교안이며 <민들레>9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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