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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다들 전문가 수준입니다. ‘식구총회’가 열리면 누구나 10~20분 발언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서론과 개념에 대한 발언이 대부분을 차지 할 정도로 모든 문제를 철학과 원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원칙과 철학이 같아도 현실은 제 각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신들이 너무 강해서 빚어지는 갈등이 많습니다. 따라서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대안적 삶을 살기위한 나름의 모색이라고 보여 집니다.

학교 당국에 대한 신뢰도 한 순간에 불만으로 뒤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학교운영의 주체이면서 학생을 학교에 맡긴 학부모라는 이중적 신분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간, 돈, 의견대립이 큰 부담

마리학교는 작은 아이가 입학 할 때는 27명이었는데 졸업 할 때는 11명이 남았을 정도입니다. 남은 학생이나 떠난 학생이나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아니고 그만큼 대안적으로 살기위한 모색이 치열하다는 것이며 대안학교 보내면 학교에서 알아서 아이를 대안적으로 키워주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는 한편에서는 편입하기 위해 찾아오는 학생도 줄을 잇습니다.

대안의 삶은 그만큼 만들어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살아있는 생물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아이들의 몸에 밴 다종다양한 폭력성과 이기적인 욕망들은 갑자기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대안학교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분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하급생이나 친구사이의 폭력과 도둑질, 왕따시키기 수업 빼 먹기 등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럴 때 학부모는 열이면 여덟, 아홉은 학교측의 ‘지혜롭고 신속하고 단호한 대응’을 기대합니다.

학교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학부모와 교사와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더디지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풀어 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위에 소개한 우리 두 아이의 전자우편 설문조사에서 제가 이런 걸 물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예상과 달라서 놀라거나 적응이 힘들었던 것이 뭐가 있냐고요. 큰 아이가 아주 충격적이었던 사건을 고백하더군요.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국어시간인데 글쓰기를 했대요. 그런데 선생님이 연필과 종이만 주고 글을 쓰라고 해서 아이들이 아무도 글을 못 쓰고 있었대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그랬대요. “선생님. 주제가 뭔데요?”라고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주제?”하면서 한참 생각하더니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하더래요. 그래서 우리 아이는 물론이고 학생들이 어안이 벙벙해 진거죠.

그런데도 아이들이 글을 못 쓰고 있었대요. 또 한 아이가 또 물었대요. 분량은 어느 정도 써야 하느냐고요. A4용지로 몇 장 쓰면 되냐고요. 그러자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맘대로!”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아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의 삶이 달라졌을 정도인 듯합니다. 우리 아이는 물론이고 다들 단 한번도 맘대로 해 본 적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여덟 살이 되니 초등학교 들어가야 했고, 국어시간 45분 끝나면 딱 15분 쉬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수학 책 펴 놔야하고... 모든 것이 스스로 정한 게 없는 삶을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 해 보면 여러분들의 집안에서도 그랬을 겁니다.

실상사작은학교는 큰 아이가 2학년 때던가 방학식을 하다가 방학을 1주일이나 미루는 일이 생겼었는데 공양간 오가는 길에 처마 밑에 걸린 곶감을 아이들이 빼 먹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이 방학을 못하고서라도 이런 도벽을 뿌리부터 접근하여 극복하자고 하며 매일매일 108배를 하면서 공동으로 참회의 1주일을 보냈습니다.

만만찮은 과제 - 대안학교 학부모로 살기

그런데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대안학교가 그렇습니다. 학생들에게 일어난 문제는 당사자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학교공동체의 분위기와 성격의 문제로 보면서 어른들이 같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마리학교나 풀무학교에서도 작은학교와 유사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개인영역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의 집단성을 중요시하는 교육법이었습니다.

마리학교에서는 돈을 잃어버린 학생이 있었는데 식구총회가 여러 시간 동안 열렸지만 돈을 훔쳐간 사람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마침 학부모 대표로서 제가 사회를 봤었는데 결정은 이랬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일종의 피해자인 돈 잃은 학생에게 가해자의 심정으로 위로나 보상을 해주자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때 나온 이야기가, 어떤 학생은 돈 잃은 학생의 밥그릇을 일주일 동안 설거지 해 주겠다고 하기도 했고 안아 주겠다는 학생. 편지를 써서 위로 해 주겠다는 학생 등등 이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피해자는 분명한데 가해자가 안 보일 때가 많습니다. 엠피쓰리나 돈을 분실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컴퓨터 메모리칩이 사라지는 경우도 그에 해당합니다. 한번은 돈을 잃은 아이에게 공동체에서 108배 참회를 선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들 설거지 대신 해주기나 안마 해 주기 등등의 결정을 하는데 유독 교장선생님이 같이 108배 참회를 하자고 해서 당사자 학생이 어리둥절하여 항의 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학생이 뒤 늦게 교장선생님의 속뜻을 알아채고 크게 깨쳤다고 합니다. ‘너 안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 그 학생의 고백이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는 위대한 발견인 것입니다. 이렇게 후일담으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는 그냥 ‘와~ 놀랍다’정도 일지 모르지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리학교에서는 학사일정을 학점제로 운영했는데 국·영·수가 필수가 아니라 철학과 역사와 토론과 농사일이 필수고 다른 과목이 선택인 것입니다. 필수과목 외에는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아도 허용되었습니다. 그러자 만날 빈둥빈둥 노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빈둥거릴 때의 기분과 정서를 한껏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지요. 원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과목시간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 공부 방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 것이고요. 핵심은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하는 훈련입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지요.

논리와 이성보다 수용과 공감능력이 더 중요

감정보다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고 나를 남 속에서 발견하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논리보다도 마음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명상과 묵언 수업이 있는 이유입니다. 명상을 통해 도달하는 지점은 수용과 공감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땅에서 엎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하지 않고 외적 강제를 동원하여 뭔가를 하게 해서는 그 외부적 자극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원위치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방송통신대 대안교육연수 온라인 티브이 강의 교안이며 <민들레>9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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