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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엔 산비탈을 일구어 차 밭으로 만든 곳이 많았다.
ⓒ 강기희
오랜만에 길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이처럼 마음 편하게 길을 떠나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의 자유로운 길 떠남은 작은 형이 휴가를 맞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천리가 넘는 여행길, 곳곳에서 폭우 만나

집을 떠난 건 지난주 금요일(10일)이었다. 살고 있는 강원도 정선에서의 출발은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첫날의 목적지는 전라남도 보성땅. 먼 보성까지 가는 이유는 보성에 살고 있는 한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가족과 아비의 고향인 보성으로 이사 갔다. 아이를 포함해 다섯 가족 모두 장애가 있는 이들의 삶이 궁금하기도 했고, 도시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아이의 섧은 마음을 달래주고도 싶었다.

아이와의 애초 약속은 토요일이었으나 그날 오후 전북 고창에서 문학 행사가 잡혀 있기에 전날 출발하기로 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다고 해도 보성에서 아이를 만나고 행사가 있는 고창까지 움직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도 되지 않은 거리였다.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보성으로 갈까, 호남고속도로를 탈까 고민하다가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도로를 보며 대충 계산해 보니 적어도 7시간은 걸릴 듯 보였다.

정선에서 42번 국도를 이용해 새말IC까지, 새말IC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호법분기점까지, 호법에서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남이분기점까지, 남이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를 갈아타야만 했다.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날 정도로 먼 여정이었다.

보성으로 가는 도중 비는 곳곳에서 내렸다. 비는 앞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쏟아졌다. 마치 양동이로 쏟아붓는 듯한 빗속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쨍한 햇살이 퍼졌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어느 마을은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승용차는 게임을 하듯 비가 내리는 곳을 지나치고 만났다.

전주 못 미쳐서 최종수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면 그와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전주막걸리를 한 잔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 신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가 싶어 그냥 전주를 지나쳤다.

▲ 보성 장터. 장날이 아니어서 한산하다.
ⓒ 강기희
▲ 해물을 손질하는 아주머니. 영화 속 풍경처럼 아련하다.
ⓒ 강기희
전주를 지날 때의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둡기 전에 보성에 도착하리라는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날이 훤할 때 한 곳이라도 들러야겠다는 생각에 모악산으로 갔다.

여행 중 길 잃는 것도 여행의 재미

언젠가 모악산 금산사에 갔다가 안도현 시인에게 잡혀 입구에서 막걸리만 마시고 왔던 기억이 있어 이번 참에 금산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후백제의 부활을 꿈꾼 견훤의 흔적이 남아있는 금산사는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극락전 하나만큼은 당시 목조 건물의 예술성을 맛보기엔 충분했다.

늦은 오후임에도 절 마당에 퍼진 햇볕은 강렬했다. 땀이 가슴팍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더위를 참지 못하고 절집 앞을 흐르는 계곡을 찾았으나 계곡물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손이 시릴 정도로 찬 가리왕산의 계곡물이 간절했다.

오후 6시를 넘겨 금산사를 나와 호남고속도로에 올라탔다. 너른 김제평야는 지평선을 끝도 없이 만들어냈고, 여정 바쁜 태양은 빠르게 지평선으로 기울어져 갔다. 광주에 이르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초행길인 보성으로의 여행을 힘들게 했다. 아이와의 약속을 다음날 오전 중으로 잡았기에 급할 것은 없었지만 하룻밤 묵을 장소는 정해야 했다. 어디로 갈까,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땅끝과 바다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하고 다시 지도를 펼쳤다.

아이와 만나기 가까운 곳에 있는 땅끝은 보성만에 있는 율포해수욕장이었다. 광주를 지나 순천으로 길을 잡았다. 29번 국도를 타야 했음에도 밤길인지라 길을 놓치고 말았다. 흔히 있는 일이니 길 눈 어둔 탓을 처지도 아니었다.

순천 시가지를 지나 어쩌다 접어든 길은 벌교로 가는 도로였다. 보성 가는 길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벌교까지 어둠을 뚫고 달렸다. 벌교에서 다시 보성으로 왔을 땐 밤 9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어렵사리 구한 숙소에 이르니 몸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부터 여름 감기로 몸이 신통치 않았는데, 먼 여행으로 몸살까지 난 상태였다. 휴가철이지만 오랜 비 탓으로 해수욕장은 인적이 뜸했다. 가끔 폭죽이 하늘을 날아올랐지만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 막 잡히기 시작한다는 전어 구이로 쓴 소주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함께 길 떠난 이와의 난데없는 언쟁으로 밤이 길기도 했지만 아침에 맞이한 보성만은 아름다웠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율포를 떠나 보성 읍내로 향했다.

▲ 삶의 찌든 때까지 빼 줄 것 같은 보성의 세탁소.
ⓒ 강기희
▲ 보성 거리를 지나가는 버스. 풍경이 정겹다.
ⓒ 강기희
영화 세트장 같은 보성 장터엔 훈훈한 인심이 별미

보성으로 이르는 길은 푸른 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보성이 녹차로 유명하다는 말을 그제야 상기하면서 차밭 언덕에 잠시 머물렀다. 곳곳에 자리 잡은 다원들은 굳이 보성녹차의 유명세를 짐작하게 했다. 담배 두어 대를 피우고 숨을 고르는 사이 녹차 향이 몸속까지 밀려 들어왔다.

보성 읍내로 이르는 길은 메타쉐콰이어가 심어진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날 벌교에서 보성에 이르는 길도 메타쉐콰이어 길이었다. 강원도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최대한 속도를 줄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도에 늘어선 메타쉐콰이어는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기품있는 자세로 인사했다.

읍내에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는 읍내에 살고 있지 않은지 '하트 피자' 집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 읍내를 둘러보았다. 작은 읍내는 정선만큼이나 정겨웠다.

주말 오전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시장에 펼쳐진 난전의 모습도 여느 시골 장터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아주머니들이 들고 나온 물건들이었다. 푸성귀나 나물이 주종을 이루는 정선 장터와 달리 보성은 꼬막이나 갈치 등의 해산물이 전부였다.

"싱싱해 보이네요."
"꼬막 하믄 보성이지라. 이건 도시에서 맛 볼 수 없는 참꼬막인디 좀 사가소."


난전을 펴고 있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말하는 중에서 아주머니 옷에서는 비릿한 갯바람 냄새가 났다. 여행 중이라 살 수 없다 하니 맛이나 보라 한다. 꼬막 속젖을 입에 넣어 주는 아주머니의 훈훈한 인심이 마치 고향 마을처럼 푸근하다.

잠시 후 영화 세트장 같은 보성 장터거리로 버스가 들어섰다. 버스는 두어 사람을 태우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라졌다.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거리를 걸었다. 보성거리엔 오래된 간판이 곳곳에 남아 있어 여행객의 걸음을 자주 멈추게 했다. 여행객은 오래된 간판을 카메라에 담으며 그 정겨움에 홀로 미소를 지었다.

▲ 약국 앞에서 약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 강기희
▲ 보성에서 만난 서점, 손님은 없었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 강기희
보성거리에서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약국이었다. 약국의 손님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긴 의자에 앉아 약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만난 보성의 거리는 추억의 거리처럼 고요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의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보성 거리를 걷다 신발가게에 들러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샀다.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검정 고무신으로 갈아 신었다. 편안해진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그제야 여행객도 여행자가 아닌 보성의 어느 마을에 사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가게를 기웃거렸다.

보성역 앞엔 보성이 판소리 서편제의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판소리의 양대 산맥인 서편제와 동편제 중 서편제가 보성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서편제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많이 알려진 소리이기도 하다. 동편제에 비해 기교가 풍부한 서편제는 판소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소리로 알려졌다.

서편제의 고장인 보성이지만 거리에서는 판소리 한 대목 들을 수 없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판소리 한 대목 청하면 즉석에서 들을 수 있겠다 싶지만, 아이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기에 여행객은 아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잠시 후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아이의 아비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까지. 넘침을 주체 못한 요즘 사람들의 활발함 대신 아이와 아이의 가족은 하나씩의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장애가 있다 하지만 수줍게 웃는 아이와 가족들의 표정은 비장애인들의 삶보다는 몇 배 행복해 보였다.

세상을 느끼는 대로 살아가기에 꾸밈이 없고 세상살이의 빠른 속셈도 아이의 가족은 통하지 않았다. 순백의 표정에서 비장애인인 여행객이 오히려 부끄러워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자습서와 케이크를 건네주고는 다시 이별했다.

쑥스러움에 빙빙 주변을 겉돌던 아이는 그제야 눈물을 지으며 가로수를 툭툭 발로 찼다. 백미러로 비치는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고 승용차는 골목을 꺾어 큰길로 나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알아서 줍는 아이의 순수함이 언제고 변색되지 않기를 바라며 인정 많은 고장인 보성을 떠나 고창으로 향했다.

▲ 서편제의 고장 보성. 보성에선 소리 자랑 말아야 해.
ⓒ 강기희

태그:#보성, #서편제, #장터,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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