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와의 직접협상이 시작된 지난 11일 이후 잠잠하던 탈레반 측의 인질살해 위협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13일 김경자·김지나씨의 석방으로 다소 호전되는 듯했던 석방교섭은 다시 중대국면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 무장세력은 지난 주말 일부 한국언론사와 계약을 맺은 현지 통신원을 통해 "한국 측이 20일까지 성의 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않으면 인질 1~2명을 추가로 살해하겠다"고 협박한 것으로 보도됐다. 20일이 지나면 탈레반 측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예측하긴 힘들지만, 협상이 어떤 걸림돌에 부딪힌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현지 통신사인 <아프간 이슬라믹 프레스>(AIP)는 19일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하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한국 측이 아프간 정부에 탈레반 수감자를 석방하라고 압박하지 않은 탓에 협상이 실패했고, 한국 측은 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도했다. '시한'을 설정하진 않았지만 '협상 실패'를 언급한 것은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마디는 "현재 아프간 정부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기 때문에 원조국으로서 한국이 아프간 정부에 압박을 가한다면 수감자-인질 교환은 반드시 성사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질들의 상태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며 "피랍자 가족들이 한국정부에 과감한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거듭 압박했다.
한국인 피랍자들이 억류돼 있는 가즈니주의 탈레반 사령관으로 알려진 압둘라 잔도 이날 AFP통신과 가진 통화에서 동료 수감자 석방이 이행된 다음에야 한국 측과 대면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 아직 거둬들이지 않아
이 같은 보도들을 종합해보면 탈레반 측은 여전히 동료 수감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이로 인해 협상이 진전되기 어려운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 고위당국자도 19일 "탈레반 측이 아직도 동료 수감자 석방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협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관계자들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원칙적 언급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9일 오전 불시에 외교통상부 피랍대책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제사회의 원칙과 관례를 존중하되 우리 국민의 안전한 귀환이 최우선임을 분명히 해서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라"고 지침을 줬다.
그렇다고 '수감자 석방 불가'라는 아프간 정부의 입장이 바뀔 조짐은 없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한국정부의 노력에 한계가 있고, 우리의 권한을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탈레반 측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해 탈레반 측에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를 내놓도록 설득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탈레반 측이 수감자 석방 요구를 쉽게 거둬들일 것 같지는 않다. 요구 관철과는 별개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아프간 정부 동맹국들 사이에 균열을 꾀하는 것도 인질극의 또 다른 목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당국자 "여성 인질 2명 석방은 건강 악화가 이유 아니다"
외교통상부는 지금까지 조중표 제1차관이 맡아왔던 아프간 현지 대책본부장을 지난주 박인국 외교정책실장으로 교체했다. 한달 째 자리를 비운 제1차관의 기능이 정상화돼야 한다는 점과 함께 "납치단체와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외교부 당국자는 설명했다.
정부가 현지 대책본부장과 일부 협상팀의 교체를 결정한 것은 여성 피랍자 2명이 석방된 직후다. 김경자·김지나씨의 석방과정을 보면서 일단 한숨 돌리는 분위기가 된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19일 2명의 석방 배경과 관련 "탈레반 측이 말한 '선의의 표시'라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며 "탈레반과 첫 대면접촉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전화접촉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진의를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일정한 '신뢰관계'가 형성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언급이다.
탈레반 측은 2명을 풀어주는 이유에 대해 일부 외신에 "여성 인질 2명의 건강이 악화돼서"라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정부는 김경자·김지나씨가 석방된 이후 건강 문제는 석방 이유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석방에서 귀국 과정에 두 사람의 모습은 탈레반 측이 관리가 어려워 풀어줘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탈레반의 의도는 2명 석방이라는 '당근'을 보여주면서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에 탈레반 수감자 석방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도록 압박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탈레반 측의 이 같은 요구가 수감자 석방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거뒀다고 판단되면 거둬들이거나 타협할 카드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