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7월 21일 밤에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를 타고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주최한 중등 영어교사 국외 어학체험연수를 떠났다.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마닐라에서 64km 남쪽으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라스바뇨스(Los Banos)를 향해 우리가 버스로 이동했을 때는 온 거리가 고요히 잠든 한밤중이었다.
40명의 영어교사들이 한 달 동안 같이 공부하면서 지낼 곳은 라구나(Laguna) 지역에 있는 필리핀국립대학 라스바뇨스 캠퍼스(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Los Banos). 그곳에서 23일부터 본격적인 영어 연수가 시작되었는데 미국, 호주 출신 원어민 선생님들과의 테솔(TESOL) 수업, 그리고 20명의 필리핀 선생님들과 일대일로 하는 수업 등이 하루하루 빠듯하게 짜여 있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하더니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전력이 부족한 나라라 한 달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정전 사고가 있을 정도로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차츰차츰 적응해 나갔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부지런히 필리핀 여행을 다닐 생각이었다.
지난 7월 28일에 떠난 '팍상한 폭포'가 필리핀에서의 첫 여행지였다.
팍상한 폭포(Pagsanjan Falls)는 내가 머물렀던 라스바뇨스와 같은 라구나 지역에 있어 하루 관광 코스로 잡기에 좋았다. 그곳 팍상한 마을은 베트남전쟁을 다룬 영화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과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Platoon, 1986)>, 그리고 조성모의 뮤직 비디오 <아시나요>가 촬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강변에 자리한 리조트에서 점심을 먹은 뒤 구명조끼를 걸쳐 입고 방카(banca)라고 부르는 배를 타러 갔다. 한 사람만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폭에 기다랗게 생긴 방카에는 보통 손님 두 명이 타며 사공 둘은 배 앞뒤에 타게 된다.
배를 타고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팍상한 폭포로 가는 길은 색다른 여행이었다. 자칫 몸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그만 배가 기울어질 것만 같은 순간순간의 두려움이 흡사 알 수 없는 우리 인생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험하고 거친 절벽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가르며 사공들이 천천히 배를 저어 갈 때면 낭만에 젖기도 하지만, 물살이 빨라지면 사공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빠지면서 우리도 아슬아슬한 모험의 스릴을 즐기게 된다.
발로 바위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공들의 재빠른 몸놀림은 마치 서커스의 놀라운 묘기를 보는 듯하고 노련한 음악가의 악기 연주를 감상하는 것 같아 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종종 바위틈 사이로 올라가거나 수심이 얕은 곳을 지나가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사공들이 내려서서 배를 끌고 밀어올리기도 했다. 배 안에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왠지 송구스러울 정도이다.
팍상한 폭포로 가는 뱃길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수많은 방카들이 오간다. 서로 먼저 가려고 거칠게 다투지 않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느긋한 광경 또한 기억에 남는다. 이따금 나이가 지긋한 사공도 눈에 띄는데, 배 앞쪽에 앉은 내 사공은 서른넷, 이름이 리또(Lito)였다. 그의 착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느새 팍상한 폭포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와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같은 방카를 탔던 사천여중의 이주원 선생님과 내가 뗏목으로 갈아타서 팍상한 폭포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사공 리또는 우리를 기다렸다.
주최 측에서 이번 필리핀 어학체험연수에 참석한 40명의 선생님들을 10명씩 해서 네 개의 조로 이미 편성해 두었는데, 내가 속한 A조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우리는 그 A의 의미를 우스갯소리로 'Aged' 'Advanced' 'Angel' 하다가 나중에는 'All'이라 해석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다른 조의 몇몇 선생님들이 우리 A조와 자주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실 한 달 연수 동안 A조가 유달리 단합이 잘된 이유는 우리가 '리차드 기어'라고 불렀던 이주원 선생님 덕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라구나의 간디'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 선생님의 역할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태운 뗏목이 팍상한 폭포를 통과하면서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가 바로 쏟아져 내렸다. 엄청난 힘으로 내리퍼붓는 폭포수를 그대로 맞다 보니 머리가 얼얼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한마디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폭포수 마사지였다. 새해가 되면 필리핀 사람들이 그 폭포수를 맞으면서 소원을 빈다고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 갑자기 세찬 비가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을 타고 부서지듯 떨어지는 하얀 빗줄기가 실같이 가느다란 폭포가 되어 흘러내리는 광경이 절경이었다.
색다른 체험을 한 팍상한 폭포를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 우리 A조는 옐로우 망고, 바나나 등 과일과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곁들여 조촐한 자리를 가지면서 팍상한 폭포에서 있었던 즐거운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