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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달이 잠시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설명 듣는 아이들
ⓒ 이기원
월악산 유스호스텔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햇살이 퍼지기 전에 첫 답사지 계립령에 도착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걸어가는데 옆에서 걷던 아이가 물어보았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
"알아맞혀 봐."
"몰라요. 가르쳐주세요."
"지금은 계립령으로 가는 거야."


계립령은 충주와 문경을 연결하는 고개다. 구름과 바람이 울고 넘었던 고개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온달이 죽기를 각오하고 되찾으려 했던 땅 중의 한 곳이다.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삼국사기> 권 45, '열전 온달조'에는 마지막 전투를 떠나기 전 온달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온달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투 중에 화살을 맞아 목숨도 잃었다.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찾지 못했기에 돌아올 수도 없었다. 죽어서조차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평강공주가 눈물로 호소하자 겨우 움직였다고 전하고 있다.

▲ 온달이 되찾고자 했던 죽령 이북의 땅, 온달산성
ⓒ 이기원
온달장군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하는 곳이 죽령 이북의 땅 온달산성이다. 어제 아이들과 비 맞으며 답사한 곳이다.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남한강 일대를 지킬 수 없다. 죽령을 넘지 못하면 남한강으로 진출할 수 없다. 그래서 고구려나 신라가 필사적으로 차지하려고 애쓰던 요충지였다.

그렇다면 계립령은 어디일까.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연결하는 고개다. 단지 경북과 충북을 연결하는 고개가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가 목숨을 걸고 차지하려 했던 또 하나의 요충지였다.

계립령 입구 안내판 부근에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계립령 꼭대기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어디로 가는지 알아?"
"글쎄요."
"아, 저 알아요."
"말해봐."
"당근, 계립령 땅 속이지요."
"아니야."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절반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절반은 한강으로 흘러간대."


엉터리라며 아이들이 아우성이었다. 아이들의 아우성이 잦아들 무렵 차분하게 얘기해주었다. 계립령은 낙동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과 남한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을 나누어주는 분수령이라고. 낙동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남한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고.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립령을 차지해야 했다고.

▲ 계립령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 이기원
장수왕 이후 남한강 일대까지 장악했던 고구려는 신라 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일대를 빼앗긴다. 한강 유역 장악이 현실화되자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마저 물리치고 한강 일대를 독차지했다. 삼국 항쟁의 주도권이 신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강 일대를 원래 차지했던 고구려는 끊임없이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온달이 죽음을 각오하고 계립령을 되찾기 위해 떠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립령을 답사한 후 옆에 있는 중원 미륵리사지로 들어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던 온달이 군사를 이끌고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지는 곳이다. 온달이 이끄는 고구려군사들의 함성, 이를 막아내려는 신라 장수와 병사들의 거친 숨결이 느껴질 만도 하건만, 지금은 고요와 적막만 흐를 뿐이다. 병사들 앞에서 힘자랑을 하기 위해 온달이 손에 들고 놀았다는 공기돌 바위가 눈에 띌 뿐이었다.

▲ 온달이 주둔지에서 병사들에게 힘자랑 하기 위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바위
ⓒ 이기원
"온달은 왜 남한강 일대를 되찾으려 했을까?"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니까요."
"그런 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글쎄요."


육상 교통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에게 강물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험준한 산과 고개를 넘지 않고 손쉽게 물건을 수송하고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강을 장악한다는 것은 교통로를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강을 장악한다는 것은 중부 일대의 교통을 장악한다는 뜻이지."
"네."
"그래서 신라도 고구려도 한강 일대를 양보할 수 없었던 거야."


어느 나라도 양보할 수 없는 땅을 요충지라 했다. 문경과 충주를 연결하는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를 사이에 둔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의 핏빛 함성과 거친 숨결이 곳곳에 스며든 역사의 현장이다.

답사 설명을 하며 둘러본 아이들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 계립령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삼층석탑에서
ⓒ 이기원

덧붙이는 글 | 강원역사교사모임과 원주 YMCA에서 원주지역 초, 중, 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역사 캠프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남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을 찾아서란 주제로 7월 21일부터 22일에 걸쳐 단양, 충주 일대의 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진행된 전국 청소년 대상의 만주 고구려 유적 답사와 연결된 프로그램입니다. 이 과정을 모두 기사로 쓸 예정입니다.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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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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