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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 아저씨를 위하여 직접 쓰셨는지....
우체부 아저씨를 위하여 직접 쓰셨는지.... ⓒ 정명희
지난 오월 작고하신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를 다녀왔다. 8월 광복절 지나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못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찾아 나섰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후 여기저기 선생을 추모하는 글들에서 자연 이 주소를 외우게 되었다.

"일단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서 안동으로 빠져나간 다음에 일직면을 찾고, 일직면 찾으면 조탑리도 자연스레 찾을 수 있겠지."

주소 하나만 달랑 알고 사진에서 보던 이미지만 머릿속에 넣고 찾아가는 길이라 그래도 내심 잔뜩 헤매는 것 아냐 하며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고속도로에서 안동으로 빠져나온 바로 그 동네가 일직면이었고, 아마 5분도 못 가서 바로 조탑리였다.

조탑리는 그 이름이 설명해주듯 마을 어귀에 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교회도 보였는데 아마 선생이 종지기로 지냈던 그 교회인가 싶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마을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일단 구멍가게나 교회로 가서 물어볼까 하던 찰나 아저씨 한 분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셨다.

"저기, 안녕하세요? 권정생 선생님 생가가 어딘지요?"
"요 위로 올라가면 외딴집 하나 있을 겁니다."

아무런 표식 없이 방치된 것에 놀라

추모의 글을 적을 방명록이라도 하나 두었더라면...
추모의 글을 적을 방명록이라도 하나 두었더라면... ⓒ 정명희
마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올라가니, 정말 사진으로 워낙 많이 봐와서 그런지 한눈에 선생의 집임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오월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몇 주일은 늘 주말마다 추모객들이 붐빈다고 했고, 선생의 책들을 평상에 두고 애도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간 석 달 후의 모습은 마냥 허허로웠다. 홀아비 몸에다 물욕도 없었으니 그냥저냥 허름하고, 소박하고, 쓸쓸하게 살다 가신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박' 그대로 이기 보다는 뭔가 '방치'된 느낌이 들었다.

선생은 유언하기를 집을 부수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는데, 선생이 돌아간 직후의 여론은 선생의 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쪽이 우세한 느낌이었다. 나 자신도 당연히 보존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불과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런 표식도 없이 어지러운 모습을 보니 자못 죄송스러웠다. 이럴 줄 알고 선생은 흙으로 돌려 달라 하셨는지….

그래서 생각하기를, 추모위원회(?) 쪽에서 선생의 생가를 당분간 보류이든 보존이던 우선 그대로 둘 거면,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리를 좀 한 후 '안내문'이라도 하나 세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여느 시골 폐가와 똑같은 모습으로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가 탐스럽게..
포도가 탐스럽게.. ⓒ 정명희
한 발 찍고 보니 부추밭이어서 깜짝 놀랐다. 그 누구라도 베어가는 것이 옳을지...
한 발 찍고 보니 부추밭이어서 깜짝 놀랐다. 그 누구라도 베어가는 것이 옳을지... ⓒ 정명희
한편, 이런저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의 텃밭과 집 주위에는 변함없이 선생의 친구들이자 자연의 열매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아주 없는 게 없었다. 호박잎, 콩잎, 깻잎에다 부추 밭, 그런가 하면 뽕나무, 산수유나무, 고욤나무, 앵두나무, 은행나무, 포도덩굴 등 다들 열매를 실하게 맺고들 있었다. 익모초며 국화도 때 되면 꽃을 피우겠지….

너무도 소박하게 살다 가신 모습에 저절로 고개 숙여져....

선생이 사용하시던 수도
선생이 사용하시던 수도 ⓒ 정명희
마당의 솥..
마당의 솥.. ⓒ 정명희
동화작가 권정생. 아이의 받아쓰기 숙제 때문에 초등 1학년 읽기 책장을 넘기다 <강아지 똥>을 보게 되었다. "마침 잘 됐네" 나는 스크랩해 두었던, 언젠가 <한겨레>에 실렸던 선생의 인터뷰기사를 보여주며 "이분이 바로 이분이여" 하며 아이에게 선생의 삶을 얘기해 주었었다.

그러다 지난 오월 갑자기 영면하시자 역시 신문을 들추며 "글쎄, 이분이 돌아가셨다는구나" 하면서 훌쩍거리기도 했다. 그때 막연히 여름 방학하면 우리도 선생의 생가를 한번 찾도록 하자며 운을 띄웠었는데….

막상 가서 선생의 사시던 모습을 보니 세상에 어쩜 그리도 소박하게 사시다가 가실 수가 있는지 마음이 울컥했다. 선생의 인세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동화작가임을 비춰 볼 때 모르긴 해도 안동 시내의 비싼 집 수채는 사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데도 한턱내는 척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돌아가신 후 동네 사람들 입에서 "그 사람이 그리 유명 했수? 우린 몰랐소"라는 말을 들으시다니.

돈, 돈, 돈.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돈이 모인다, 저렇게 해서 돈을 모아라. 투자, 투자, 투자…. 물질에 대한 숭배가 끝이 없다. 이런 세상을 선생은 마지막 가는 그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살다 가셨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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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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