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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 학살 희생자 유가족 성보경(70)씨
ⓒ 김영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빨갱이 소리 하는 거 이제는 지겹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섞여 있었다. 치열한 이념의 대립으로 두 형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온갖 억압을 당하며 가슴속에 한을 품고 60여년을 살아온 성보경(70)씨, 그 역시 한국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유가족이다.

이유 없이 끌려간 큰 형

"당시 우리 큰 형님은 어느 사상에 치우친 분도 아니었고, 좌익·우익이라는 것도 관심 없으셨던 분이셨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김일성 위해서 일하다 죽은 거라고 하는데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과 가진 작은 모임이 문제였다. 단순히 이야기나 하자고 만난 그 모임이 활성화 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눈총을 받기 시작했다. 1948년 초겨울, 당시 11살이었던 그는 형이 끌려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밤에 자고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들이 와서 데리고 나갔어요. 군인 모자를 쓴 사람 하나랑 사복 입은 사람 하나가 왔어요. 어른들이 깨서 '왜 데리고 가느냐' 라고 물었지만 그 사람들은 상의 할 것이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단순히 상의한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집 앞이 차가 들어올 만한 길이 아니었는데도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어요. 그 차안에는 이미 3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계속 쫓아가니까 한 사람이 '왜 따라 오냐'며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부터 약 2년 동안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큰 형이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갔던 일도 기억한다.

"형님은 용수를 쓰고 나와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사람답게 살라고, 인간답게 살라고 늘 가르쳤건만 무슨 죄가 있어서 감옥에 있느냐' 고 하시며 형을 나무라셨죠. 형은 '아버지 저 죄 없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지켜보고 있던 간수가 '왜 죄가 없어!'라고 큰 소리를 쳤어요."

성씨와는 무려 17살 차이로 항상 엄격하고 무섭기만 했던 형이다. 면회를 가면 "막내 왔구나" 라고 말하던 형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의 형은 당시 22살에 결혼해 자식이 4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영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억울한 누명,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작은 형

큰 형이 총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때부터 무려 16명의 식구를 데리고 살림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오직 아버지 어머니의 몫이었다. 친한 사람들마저 '저 집안은 빨갱이 집안' 이라고 외면해 버렸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작은 형이 20살 때, 그때로는 혼기를 놓친 거죠. 그래서 결혼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빨갱이 집안' 이라고 하면서 누구도 거들떠 봐 주질 않았어요."

사람들의 오해는 끝이 없었고 결국 작은 형도 잡혀가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었는데 작은 형도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누님이 출가한 충북으로 도망가서 남의 집 일꾼으로 살았어요. 그런데도 들판서 일하는데 그냥 잡아 갔데요."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형은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아직까지 뚜렷한 소식이 없다. 그래서 큰 형의 제사는 지인이 알려준 음력 5월 20일에 지내지만 작은 형의 제사는 지내지 않고 있다.

"명절에…설날이랑 추석에 마음속으로 생각 하며 술 한 잔씩 올립니다. 결혼을 못했으니 자식도 없고…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형이에요. 마음이 아프죠."

큰 형은 7대 종손이었다. 종갓집으로 집안 형편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두 형이 모두 끌려가면서 조카도 병으로 두 명이나 죽었고 아래 두 동생도 모두 죽었다.

"부모님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사셨죠. 홍역으로 손자들 잃고 땅에 묻고 오면 그 다음날 또 죽고…집안에 평온이 사라졌습니다."

물질적 보상보다는 마음의 보상이 중요해

그가 군대에 가기 전, 골령골에서 학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본 산내는 황량한 벌판에 나무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착잡했다.

"지금 산내 얘기가 이렇게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특별법이 만들어 졌으니 조속히 해결해 줘야지, 왜 이렇게 주춤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산내 유가족들이 '행여나 또 다시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사건 자체를 말하기를 꺼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고단했다는 증거다.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을 이제야 조금씩 뱉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만큼 오기까지 노력해준 사람들에게 고맙기도 하지만 끝까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어요. 이번 정부 임기에 마무리되길 바랄 뿐입니다."

현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제가 일 년에 한 번씩 산내에서 개최되고 있지만 그 역시 빠듯한 예산으로 인해 힘든 상황이다. 유족들의 자비로 위령제를 지낸다.

"너무도 무심한 대전 동구청장에게 가서 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투 쓴 사람들은 꿈쩍도 안 해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 다른 지역 보세요. 자치단체장이 앞서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어요. 대전만 유난히 힘들어요. 우리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막내아들마저 붙잡혀 갈까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끊임없이 도망 다녔고, 군대 갔을 때도 신원조회에 걸려 보직을 받을 수 없었던 성보경씨.

그는 인터뷰 내내 "아는 것이 없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쑥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질문에도 망설이거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태그:#대전 산내 학살, #성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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