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70년대 중반에 제가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난 그 무렵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엄청난 문제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중학교 아이들은 아무나 붙잡아다가 싸움을 시키다가 한쪽이 주저앉으면 대신 내가 맡아서 때려 주곤 해서 어머니는 거의 날마다 내게 맞은 아이들의 치료비를 물어 주느라고 주머니가 잠시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중학교에서 가장 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과 운동장에서 한판 붙어서 전교생이 보고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서로 치고받으면서 운동장을 헤매기도 하였으니까요. 그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에 야구 선수이셨는데 아주 건장하고 힘도 세셨지요. 그런 선생님을 대적하려니까 힘이 달리더라고요. 그래서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온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지요. 감히 누가 나와서 말리려고도 하지 못하고 구경들만 하고 있었지요.
이런 사고뭉치인 제가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은 바로 이숙이셨습니다. 당시 같은 읍내에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셨고, 내 피붙이 가족으로는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사고만 치고 다니는 제게 이숙이 어느 날 책을 한 권 맡겨 주셨습니다. <법구경>이라는 책인데 초록색의 표지에 베로 장정을 싸서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제게 주면서 '너 이 책을 세 번만 읽어 보아라. 내용이 어렵고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한자는 나도 읽기 어려우니 한글로 엮어진 부분만이라도 잘 읽어 보아라' 하셨어요.
그때까지 난 책이라고는 담을 쌓고 싸움만 하고 다니던 망나니였지만,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였어요. 정말 세 번을 읽고 반쯤 더 읽었던 것 같아요.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로 엮어진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잘못하고 있던 행동들에 대해서 조금씩 자책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지요. 그런데 그 법구경을 읽고 난 다음이라서 그랬는지 어떤 어려운 책을 읽어도 어려운 줄을 모르겠고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이미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공부를 했어야 고등학교 시험을 보거나 말거나 하죠. 보기 좋게 떨어진 저를 어느 사립학교에 입학시켜서 공부하게 만들어 주셨기에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가지게 되었지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제의 그 법구경 책을 서재에서 찾아보았다. 늘 정리하여 두고 살지만 요즘에 별로 읽은 적이 없어선지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 한참 살피다가 책을 빼들었다. 이 책은 내가 발령을 받은 첫해 1964년 9월에 산 책이었다. 내가 비교적 자주 들여다 보면서 음미하곤 했지만 그날의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사실 그 무렵 가끔 이숙 집에 가면 그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에 들어가서 책에서 풍겨 나오는 책 냄새만 맡고 있어도 내가 흐뭇해지곤 하였어요. 온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많은 책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도 먹게 되었구요. 언젠가는 나도 어른이 되면 멋진 서재를 꾸미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글을 써 보아야지 하고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하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유복자나 다름없이 자라난 이질은 중학교 시절에 그렇게 사고뭉치 노릇을 했지만, 성적은 항상 5위권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면서 영영 학교 공부와 담을 쌓고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 말썽을 부렸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나는 책을 꺼내들고 앉아서 이질의 딸인 손녀딸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난 이미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니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구나. 나도 이 책을 좋아하여서 이 책의 각 장을 하나의 주제로 하여 26편의 동화를 써서 <동화 법구경>을 하나 만들어 볼 예정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말썽꾸러기였던 지난날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구에겐가 이렇게 영향을 미쳤구나 싶으니 걱정이 생겼다. 혹시 이와 반대로 나는 무심히 한 이야기가 어느 제자의 가슴에 피멍이 되어서 늙어가면서도 늘 원망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지난 42년간의 교직 생활 내내 큰 죄를 지었던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저질렀었다면 나 자신의 잘못을 사죄할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는 방법이 없으니 남은 세월이나마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봉사하고, 베풀어가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녹원환경뉴스, 한국일보디지털특파원, 국정브리핑, 개인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