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를 놓고 찬반 양론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공판에서는 한미 FTA에 반대 입장을 가진 전문가로부터 설명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직접적인 쟁점은 차치하고 균형잡힌 시각과 판단을 위해서다." /(재판장)
한미 FTA가 법정에 섰다. 29일 오후 4시, 대전고등법원 제1형사부(부장 판사 김상준)에서다.
이날 공판은 지난해 11월 22일 충남도청 앞에서 열린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집회와 관련 특수공무집행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양호 민주노동당 전 사무처장 등 6명에 대한 2차 항소심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한미FTA 문제점'에 대한 전문가 감정 증언을 1시간여 동안 허용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미FTA'가 국내 법정에 선 것.
감정 증언에는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가 나섰다. 송 변호사는 수륜법률 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한미FTA 마지노선>, 한미FTA 협정문 공개 이후 최초의 해설서로 꼽히는 <한미 FTA 핸드북> 등을 집필한 바 있다.
송 변호사는 시청각 보조자료인 파워 포인트를 활용해 '한미 FTA와 국민주권'을 주제로 '한미 FTA'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송 변호사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방청객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헌법 119조 침해 소지 다분"... 사법권도 도마 위에
한미 FTA에 대한 공격은 협정문의 법적 성격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한국에서 FTA협정문은 국회비준과 동시에 국내법령과 동일한 지위를 갖게 된다"며 전북도의 학교급식 조례가 WTO 협정과 어긋나 무효 판정을 받은 대법원 판례를 예시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미국에서는 미합중국 법률과 어긋나는 FTA 어떤 조항도 어떤 상황에서건 무효로 미국 국내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즉 한국은 한미 FTA 협정문이 국내법령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 반면, 미국에서는 국내법에 해당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한미FTA가 헌법이 정한 경제민주화 조항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헌법 119조에는 경제 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권한을 행사해서 필요하면 규제하도록 하고 있는데 한미FTA로 이같은 권한이 침해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일례로 현재는 지역 중소상인과 중소상권의 유지를 위해 대형 할인마트의 진입과 영업방식에 대한 제한 조치가 가능하다"며 "하지만 한미FTA에서는 이 같은 헌법 119조의 경제민주화 조항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사법권의 문제도 도마 위에 올려졌다. 그는 "투자자 국제중재회부권은 사법부와 검찰의 조치에 대해서도 한미 FTA위반임을 이유로 상대국을 국제 중재에 회부할 권한이 부여하는 제도"라며 "공동체 질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밝혔다.
"합법적 의사표현 하다 목숨 잃은 농민... 직접행동 뿐이었다"
특히 강조한 대목은 한미FTA 협상 과정이다. 그는 "정부가 공청회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지난해 2월 3일 협상개시를 선언했다"며 "이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 심의의결시 미리 공청회를 개최해 그 결과를 제출하도록 한 지유무역협정 절차 규정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협상과정에서 농민계·노동계·시민 등 이해 당사자의 참여가 배제됐고 협상의 실질적 내용이 비공개됐다"며 "여기에 더해 개성공단 문제나 외환위기 세이프가드 조항 등 타결 내용을 비롯 재협상 경위마저 왜곡해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송 변호사는 "결국 국회를 통해 주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국회가 수정 동의하거나 비준 동의거부를 하리라는 기대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단정했다.
이에 대해 재판장은 "이번 재판과 관련해 '의견수렴 과정'은 중요한 대목"이라며 "한미FTA에 대한 구속력있는 (이해 당사자들의) 절차적 의견수렴 과정이 있었냐"고 질의했다.
송 변호사는 "처음에 인터넷을 통한 의견수렴을 시도한 적은 있었으나 협상과정에 활용하거나 이를 반영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구속력 있는 의견수렴 절차나 통로가 없다"고 답했다.
송 변호사는 "오히려 한 농민이 생존권과 직결된 한미FTA와 관련한 의사를 합법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애석하게도 실질적 참여나 개입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현실에서 국민의 직접 행동 외에 다른 방안이 없었다"고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송 변호사의 1시간여에 걸친 증언이 끝나자 재판장은 "나라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한미FTA 협정문이) 만들어져야 하는 만큼 지혜를 모아야 한다"며 "이를 위해 (이해당사자가)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고 일부 동의 의견을 피력했다.
검찰 "불법 시위 근절해야"... 각각 징역 4년, 징역 3년 구형
반면 검찰은 "현재 사회적으로 개인 또는 단체가 서로 얘기를 듣고 토론하는 문화와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느냐"며 피고인들의 불법 집회에 초점을 맞췄다.
송 변호사는 "시골 노인들이 한미FTA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공권력에 의해 번번히 진압됐다"며 "적어도 한미FTA협상 과정에서는 의견을 피력할 실질적 통로가 제공되거나 참여방안이 없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날 피고인들에게 "정당성 여부를 떠나 불법 폭력시위를 근절해야 한다"며 민주노동당 김 전 사무처장 등 5명에게 징역 4년을, 한미FTA저지 공동대표인 안 모(49)씨에게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의 판단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송 변호사가 제기한 '한미FTA 문제점'과 해당 재판 쟁점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지만 한미FTA 협상 과정에 참여방안 여부는 재판 쟁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선고 공판은 내달 21일 오전 10시 열릴 예정이다.
한편 김 전 사무처장 등 4명은 지난해 11월 22일 충남도청 앞에서 열린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집회와 관련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각각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또 같은 혐의로 기소된 안 모(49·한미FTA저지 공동대표)씨 등 2명은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