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만은 탄금대에서의 비참한 패배를 알리고 왜군에게 맞서 싸울 것을 알려야할 의무감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었다. 해가 진 후에도 계속 산길을 가던 그는 결국 산길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조유만의 주위에는 풀벌레 소리마저 잠잠하여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보게."
조유만은 누군가 자신의 몸을 더듬자 크게 놀라 소리쳤다.
"으악! 누, 누구요!"
"쉬잇! 근처에 왜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네!"
조유만이 겨우 얼굴을 보니 밤송이 같은 수염이 난 얼굴만 겨우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자네 전장에서 빠져나오는 길인가?"
조유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가 누구인지 자세히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낯선 얼굴이었다.
"나도 그렇네. 신립장군이 전사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강 속으로 몸을 던졌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군. 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자네 혼자인가?"
"행여 다른 이가 있을지는 모르나 마주친 바는 없습니다."
조유만은 상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걸걸한 목소리에 찢어지긴 했지만 붉은 전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높은 직에 있는 무관이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자네 고향이 어디인가?"
"부산입니다."
"허! 어떻게 부산에 있는 장정이 한양까지 올라와 싸움터에 나서게 되었는가?"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럼 한양에 아는 사람은 있는가?"
조유만은 자신이 사실 성균관 유생이었노라고 밝히려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따위 말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유만은 한양에는 아는 사람이 없노라고 대답했고 그 순간 긴 칼이 조유만의 목에 겨누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난 조정에 충주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야 한다. 허나 패장이 빈손으로 돌아가면 면목이 없을 것인즉 네 목을 빌어 왜군을 베어온 것으로 하여 죄를 덜고자 한다."
"나 역시 선비로서 조정에 알릴 말이 있사외다! 이 칼 치우시오!"
"미안허이."
칼이 번뜩였고 조유만의 목은 힘없이 땅바닥을 굴렀다.
며칠 후, 조정은 충주 탄금대에서의 패배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민심위무를 위해 탄금대에서 잡아 죽여 잘라왔다는 왜군의 머리가 남쪽 성문에 내걸렸지만 아무도 그를 보고 위안을 삼지는 못했다.
내어걸린 머리는 눈이 감겨 있었지만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서서히 눈을 뜨더니 남쪽을 쳐다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얼마 뒤 왜군이 쳐들어와 한양 도성 남문에 당도할 때까지 그 머리는 썩지도 않은 채 그렇게 모두를 노려보았다. 수많은 시체와 잘린 머리를 보아온 왜군이었지만 그 아래를 지나며 왜군들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함을 느꼈다. 순간 그 대열 가운데 왜군 하나가 뛰어나와 머리를 자세히 바라보고는 크게 통곡을 했다.
"유만아! 유만아!"
그 아래에서는 왜군의 복색을 한 채 땅을 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비록 머리모양이 왜군 식으로 바뀌고 얼굴에 심한 상처까지 나 있었지만 그는 조유만을 금방 알아보고 있었다. 그 왜군은 박산흥이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네! 내가 무엇 때문에 왜군에 투항해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 했겠나! 이럴 수는 없는 일이네!"
박산흥의 통곡소리와 함께 조유만의 머리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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