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컴퓨터. 손자 녀석들은 할머니 집에 컴퓨터가 없으면 왔다가도 금방 가자고 보챈다. 가끔 아들 집에 가도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는다. 손자 녀석들을 만나면 주둥이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컴퓨터 이야기뿐이다. 할머니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아빠에게 야단이라도 듣고 나면 다가와 컴퓨터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아들을 둔 윤 할머니(65)는 컴퓨터가 더 없이 고맙지만 컴퓨터 때문에 애타기 일쑤다. 지난해 아들이 다니러 와 컴퓨터에 눈알(카메라)을 달고 화면에 요상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것만 누르면 된다기에 눌렀더니 손자 얼굴이 보여 신기했다. 서로 이야기도 했다.
약속된 날에 다시 전기 꽂고 그 그림을 눌렀는데도 잘 보이던 손자 녀석도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없어 애가 탄다. 학교 선생님을 몇 번 불러 부탁하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참으로 컴퓨터가 신통한 기계라는 생각을 했지만 신주단지 모시듯 해도 말썽꾸러기 손자 녀석과 한가지다. 선생님들이 몇 번 또닥거리면 또 손자가 보이고 며느리가 보인다. 도통 모를 일이다.
컴퓨터를 배우러 학교에 가다
학교에서 동네 사람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준다고 이장이 방송을 한다. 늙은 할머니도 된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학교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줄줄이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중학교도 못 다녔다. 깊이 숨었던 못 배운 한이 고개를 든다. 공짜로 학교에서 가르쳐준다는데 해보자는 생각에 옆집 할머니들과 덜컥 신청했다.
전남 여수시 화태도 화태초등학교(교장 김진오)에서는 여름 방학 동안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화태도 지역민을 대상으로 8월 27일부터 일주일 동안 '즐거운 컴퓨터 배우기' 과정을 개설했다. '컴퓨터 활용 능력을 길러 자기표현의 기회를 확대하고, 건전한 취미와 소질을 살려 자기 학습 능력을 함양하도록 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생활을 질을 높이자'는 의도이다.
초등 2·3학년 복식학급을 담당하는 배정미 선생님이 강사로 나섰다. 배우는 내용은 윈도우 기초, 한글기초, 인터넷 기초 등으로 구성하였다. 안내장이 나가고 이장님의 마을 방송 후 할머니 3분과 학부모 5명 등 총 8명이 신청하였다. 할머니 세 분은 왕초보 반으로 오전에 편성하고, 젊은 학부모 다섯 분은 오후 기초반으로 편성했다.
"이걸 누르고 'ㄱ'을 눌러야 'ㄲ'이 됩니다."
"아, 예. 어째서 당최 안 되더라니까."
"집에 이게(컴퓨터) 있으면 배운 것을 해볼 텐데. 없으니까 당최……. 어제는 둘이서 헤매고 있었당게."
할머니 두 분은 자판 기본자리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자판에는 보이는데 된소리 글쇠를 아무리 눌러도 화면에는 다른 것이 써진다. 선생님 손가락이 손오공 여의봉이다. 선생님 손이 가면 안 되던 것도 다 된다. 수줍은 웃음을 띠면서 혼잣소리처럼 변명을 하신다.
"젊은이들하고 같이 배우면 젊은이들은 머리에 금방 들어가는디. 우리는 여그 저그 눌러라 는 곳을 누르다 보면 통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에나 수준이 있는 법
"어마, 뭘 어치고 했는디 지나가 버렸데?"
윤순자 할머니는 자판연습을 지나 벌써 문서작성을 배우신다. 할머니에게는 성능 좋은 컴퓨터가 애물단지다. 글자체를 선택하려고 방향키를 눌렀는데 수많은 글자체가 이미 후루룩 지나간 지 오래다. 산비탈에 고구마 심고 고추심어 김매던 손가락이라고 무정한 자판이 가만 있질 않는다. 방향키를 두어 번 바꾸고서야 안내책자에 있는 글자체를 찾았다. 여기 적힌 것을 보시고 천천히 해보세요.
"거기 학생, 문서를 누가 줬습니까?"
문서작성 하시는 할머니가 자꾸 안내책자를 보면서 선생님께 배우자, 자판 연습하시는 할머니들이 샘이 났다. 그래도 학교는 교과서와 공책이 있어야 다니는 맛이 나는데 당신들은 교과서도 없으니 샘이 날만도 하다. 문서작성을 배우시던 할머니는 고개에 힘주고 자판 연습 중인 할머니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
"아! 당신네도 조금 있으면 줄꺼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면 죽은 듯 하늘만 쳐다보며 낮은 처마 밑 문고리를 닫고 살아온 분들이다. 라디오가 세상이야기를 들려주더니 TV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할머니들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 요상하게 생긴 컴퓨터란 녀석이 수많은 스위치를 달고 앉아 손자를 빼앗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드는가 싶다. 예전 친구들의 교복차림을 보면서 마음 아프던 기억이 새롭고 못 배운 설움이 가득한데 컴퓨터란 놈이 또 나를 외톨이로 만드는가 하여 서럽다.
그래서 학교에 왔다. 모처럼 시간 맞춰 학교에 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학교에 오면 선생님이 기다리신다. 손목은 아프지만 옛날 친구 교복 부러워하던 기억만큼 기쁨도 크다. 선생님처럼 손자처럼 손가락 보이지 않게 빠르고 멋진 모양은 아니지만 번듯한 교실에서 손가락 놀리고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배운다는 자체가 좋다.
짧은 일주일이지만 나도 어엿한 학생이다. 무엇보다 설레게 하는 것은 손자 녀석에게 보란 듯이 컴퓨터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추석에 손자가 오면 컴퓨터 배운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할머니들의 즐거운 학교나들이는 오늘(31일) 끝난다. 여수에 부탁해서 떡을 주문하고 번듯한 책거리를 선생님 몰래 준비하고 계신다. 벌써 무얼 배웠는지 아스라한 기억이 되고 있는 컴퓨터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컴퓨터 자판이나 문서 작성이 손자 녀석과 함께 할 수 있는 얘깃거리로 족하다.
"할머니 이거 끝나면 뭐하실 겁니까?"
"중학교에 한번 댕겨보면 좋컸소. 원이라도 한번 풀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