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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달 동안 필리핀에서 중등 영어교사 국외어학체험연수를 받았던 곳은 필리핀국립대학 라스바뇨스 캠퍼스(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Los Banos, 이하 UPLB)로 마닐라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연수에 참석했던 선생님들은 모두 40명. 필리핀 선생님들과 하는 수업은 일대일로 진행이 되었지만 미국, 호주 출신의 원어민 선생님들과 공부한 테솔(TESOL· 영어교사 전문양성과정) 시간에는 각 10명씩 4개의 조로 편성되어 수업을 받았다.

내가 속해 있던 조는 A조, 나이가 가장 많은 선생님들이었다. 필리핀 연수 팀은 같은 기간에 떠난 캐나다와 호주 연수 팀들과 달리 홈스테이를 하지 않고 UPLB 안의 숙소에서 같이 생활했다. 그래서 '오라버니''언니''누님' 하면서 우리 A조 선생님들끼리 가깝게 지냈는데, 지난 8월 5일에는 우리끼리 주말여행으로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를 다녀오게 되었다.

산티아고 요새에서 필리핀의 눈물을 보다

 
▲ 필리핀의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이 갇혀 있었던 산티아고 요새.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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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여행은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려 300여년간이나 스페인 지배를 받아야 했던 필리핀의 뼈아픈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트라무로스이기 때문이다. 마닐라 중심부를 흐르는 파시그강(Pasig River)의 둑을 따라 스페인 식민 시대인 16세기 말에 세워진 인트라무로스는 '벽의 안쪽(within the walls)'이라는 뜻을 지닌 거대한 성벽 도시(the Walled City)였다.

그곳에는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과 산 아구스틴 교회(San Agustin Church) 등이 있다. 우리는 먼저 인트라무로스에서 가장 오래된 요새로 스페인 군대의 사령부로 쓰였던 산티아고 요새로 갔다.

 
▲ 산티아고 요새에 있는 호세 리잘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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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요새는 특히 필리핀의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Dr. Jose Rizal)이 '나의 마지막 작별(Mi Ultimo Adios)'이란 시를 그가 사랑했던 조국에 남기고 떠난 곳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곳에서 보내고 1896년 12월 30일에 바굼바얀(Bagumbayan)의 처형장으로 그가 끌려간 길 따라 발자국 표시를 해 놓은 것이 필리핀 사람들의 안타까운 눈물을 보는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는다.

호세 리잘이 처형장으로 끌려간 길을 따라서 발자국 표시가 되어 있다.
 호세 리잘이 처형장으로 끌려간 길을 따라서 발자국 표시가 되어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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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잘이 처형된 곳에는 리잘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그의 이름을 따서 리잘 공원(Rizal Park)이 조성되어 있다. 리잘은 처형될 때 스페인 군사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 하여 돌아서서 총을 맞았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불쌍한 필리핀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여섯. 의사이면서 시인이고 소설가였던 그는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글로써 스페인의 탄압을 고발하고 필리핀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쳤던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다 버렸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필리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같다.

 
▲ 라구나의 칼람바 시에 있는 리잘 생가.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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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8월 16일에 캐스리나(Kathrina)라는 필리핀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고 라구나의 칼람바 시(Calamba City)에 있는 리잘 생가(Rizal Shrine)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을 둘러보면서 절로 그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 당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많은 재산,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명예와 학벌에다 사랑하는 여인까지 있었음에도 조국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리잘 생가에서 필리핀 선생님 Kathrina(가운데) 가족, Oliva(왼쪽)와 함께. 소년 리잘의 동상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리잘 생가에서 필리핀 선생님 Kathrina(가운데) 가족, Oliva(왼쪽)와 함께. 소년 리잘의 동상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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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리잘의 생가가 있는 라구나 지역에서는 리잘의 생일인 6월 19일을 '라구나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가 83퍼센트를 차지하는 나라인 필리핀에서는 성모마리아 상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남자 동상으로는 호세 리잘의 동상이 가장 많다.

산티아고 요새는 또한 2차 세계대전 때 수백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기도 했던 곳이다. 1950년에 그곳을 '자유의 성전(Shrine of Freedom)'이라 선언한 후로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인트라무로스에서 볼 수 있는 마차, 깔레사(Cal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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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티아고 요새에서 나와서 가까이에 있는 마닐라 대성당으로 걸어갔다. 마침 칼레사(Calesa)라 부르는 마차가 지나갔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한 이색적인 풍경이다. 마닐라 대성당은 1581년에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 동안 화재, 전쟁과 자연재해로 많이 파괴되어 몇 차례나 큰 보수 공사를 겪었다 한다.

 
▲ 마닐라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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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 산 아구스틴 교회. 마침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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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트로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양식의 석조 건축물인 산 아구스틴 교회에도 잠시 들렀다. 그날 두 곳 모두 결혼식을 하고 있어 꽤 복잡했다. 어느 책자에서 요즘 산 아구스틴 교회가 특히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꼽히고 있다는 글을 읽었던 게 떠올랐다.

마닐라 여행길에는 군데군데 빈민 지역들(slum areas)을 볼 수 있다. 비록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지만 한눈에도 비참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 마닐라 수도권)의 주요 도시에는 글로리에따(Glorietta)와 SM 계열의 몰 오브 아시아(Mall of Asia) 같이 규모가 매우 크고 화려한 쇼핑몰이 있는데, 그것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어 외국인인 내가 봐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 쇼핑몰 Mall of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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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쇼핑몰에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와 건물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따로 해 놓고 손님들마다 총기류, 마약, 폭탄 등을 소지하고 있는지 검사를 한다. 몰 오브 아시아에서는 개도 한몫을 거들고 있어 참 인상적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살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면서 겸손해지는 것 같다. 필리핀에서 한 달 동안 여러 선생님들과 어학체험연수를 받으면서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의미를 곱씹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 우리 A조 선생님들과 원어민 선생님 Don.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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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닐라인트라무로스, #필리핀, #호세리잘,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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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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