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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고드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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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은 늦더위가 유난히 심했다.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날 때까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그 무더위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 며칠 비가 내리면서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었는데 2~3일 전부터는 아예 밤이면 창문을 닫게 되었다. 새벽녘에는 한기가 들어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 수가 없어진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를 누가 감히 거슬리겠는가?

일요일(9월2일) 서울 성동구 지역은 약간 흐린 날씨에 조금씩 비가 내렸다. 아니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방울들이 어디선가 쏙쏙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비 같지 않은 어설픈 비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었다.

점심 무렵 교회 부근의 산동네인 서울 성동구 사근동을 둘러 보았다. 한양대학교 뒷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사근동은 지리상으로는 거의 서울의 도심에 해당하는 곳이지만 요즘 보기 드문 산동네다.

거대한 대학 캠퍼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옆으로는 청계천이 지나고 있어서 도심이면서도 약간은 외진 느낌이 드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나지막한 언덕과 언덕 사이에 있는 이 마을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아 가난하고 소박한 꿈속에 빠져 있는 풍경이다.

 호박 덩굴이 뒤덮인 정다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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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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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닥다닥 열린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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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오두막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산동네 비좁은 골목길에는 감나무 은행나무가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아예 담장이 없는 어느 집 옆에는 과일나무들과 화초 몇 그루가 함께 사는 사람들의 마음인 양 더욱 정다운 모습이다.

그래도 집집마다 작은 트럭이며 승용차가 보이는 것은 생계수단으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집에 번듯한 주차장이 있을 리가 없다. 마당 한쪽에 나무 기둥 몇 개 세우고 등나무 덩굴이나 호박덩굴을 올려 낮에는 의자 두어 개 내놓아 쉼터로 이용하고 밤에는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것도 매우 시골스런 풍경이다.

어느 집의 이런 간이 주차장에는 길쭉길쭉한 열매주머니를 늘어뜨린 등나무가 마치 겨울철 초가지붕의 고드름을 연상시킨다. 가을의 열매고드름이라고 할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콘크리트 높은 빌딩과 아파트 숲의 삭막함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소박한 정겨움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엉성한 판자 울타리 안쪽에서 고추를 따는 여인은 자세히 살펴보니 70대의 할머니다. 손바닥만큼 작은 고추밭에서 한줌의 풋고추를 딴 할머니는 다시 울타리를 뒤덮은 호박 덩굴을 헤치며 연한 호박잎을 딴다. 오늘 저녁은 풋고추를 썰어 만든 쌈된장에 호박잎쌈으로 드실 참이란다.

자녀들은 모두 출가하고 할아버지도 2년 전에 돌아가 홀로 살고 있는 할머니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골살림살이 면해보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평생 그 가난을 벗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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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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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까리와 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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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큰아들이 모시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작은 텃밭을 가꾸는 소일거리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겠다고 한다.

"가난이야 내 평생의 동무인데 뭘, 이젠 가난이 뭔지도 몰라."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난이 너무 익숙하여 이젠 가난을 느끼지도 않는단다. 고추밭 옆에 역시 정말 손바닥처럼 좁은 이랑이 가지런하다, 뭘 심었느냐고 물으니 김장용 무랑 배추 씨앗을 뿌렸단다.

또 다른 텃밭의 가장자리엔 예쁜 꽃들이 함초롬히 피어 있다. 나무 위를 타고 올라간 넝쿨들 사이로 빨간 꽃과 남색 꽃을 자랑이라도 하듯 피워놓고 서늘한 바람 속을 나는 벌 나비를 부르는 모습이다. 그 옆에는 해바라기 한 송이가 달랑 피어 식어가는 태양을 저 혼자 독차지라도 하려는가 보다.

모과나무와 배나무가 서 있는 작은 마당을 가진 어느 집 블록 담장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뒤덮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넓은 이파리 사이로 언뜻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아 들여다보니 역시 열매들이다. 열매가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담쟁이도 작은 열매들을 촘촘히 맺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아, 너 벌써 여기 와있었구나. 아직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정다운 풍경에 취해 비좁고 초라한 골목길을 한 시간 가까이 돌아다녔지만 땀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선선해진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들녘에 나가면 황금물결이 출렁이겠지.

 남색꽃과 빨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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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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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 만한 김장채소 밭도 씨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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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사근동, #이승철, #가난, #등나무 , #가을고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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