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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네 집으로 들어서기 전, 누가 왔는지는 근처에 주차된 차를 보고도 짐작이 갔다. 현관엔 어른들과 아이들 신발이 가득해서 우리 식구 신발은 벗어놓을 자리가 없었다. 저녁 7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그전에 다들 와 있었나 보다.


"외숙모∼ 잘 지내셨어요?"
"어머 연옥아, 반갑다!"


음식준비를 하고 있던 조카가 나를 반긴다. 조카의 치마를 잡고 있던 꼬마가 제 엄마를 올려다보는데 조카가 아이에게 말한다.


"예원아, 할머니한테 인사해야지."
"얘가 예원이야? 우와∼ 정말 많이 컸다. 애기 때 본 것 같은데 벌써!"
"올해 초등학교 입학해요. 세월 빠르죠?"


언제부턴가 시댁식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나는 결혼한 조카들의 아이들에게 할머니로 통한다. 처음엔 그 말이 나와 동떨어진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때부턴지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었다.


남편의 형제는 6남매로 시어머니의 둘째 며느리인 나는 위로 시숙과 시누이 둘이 있고, 아래로 시동생 둘이 있다. 남편 위로 두 분의 누이를 전쟁 중에 잃었으니 원래는 8남매였던 셈이다. 아주버님네만 서울에 살고, 어머니네를 중심 해서 가깝게 모여 사는 대전의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외증손주들이 모두 모이면 나는 통 정신이 없다.


"어른만 24명이오!"


밥을 한참 푸다가 밥을 나르는 조카에게 밥을 얼마나 더 퍼야 할지 물었다. 전기밥솥 말고 가스불 위에 압력밥솥 꼭지가 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내 바로 밑의 동서는 찌개에 간을 보며 한 수저를 내게 떠준다. 오늘 아침부터 하루종일 음식준비를 하느라 신경쓰이고 힘들었을 동서다.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큰 시누의 큰아들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 '송별잔치'를 위해서였다. 목회를 하는 조카는 경기도에 있는 ○○교회 부목사로 가족들을 데리고 2∼3년 정도 걸리는 유학길에 오른다. 조카는 시어머니의 제일 큰 외손자이다.


이 모임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내 바로 밑의 시동생 내외가 준비를 했다. 작년에 새집을 짓고 너른 거실을 마련한 어머니네는 이렇게 가끔 친척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동서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유학길에 오를 조카는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 축가를 불렀다. 지금 내 딸애만 했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조카.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불렀던 그 노래가 무슨 곡인지 잘 모르지만, 진지하고 경건했던 그 시간의 분위기는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조카가 기독교학과를 나와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의 길을 걷는 건 자연스럽다. 조카는 현재 두 딸의 아버지이다.

 

한때 조카의 첫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봐 준 적이 있다. 주일이면 두 부부가 각자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전도사로 바빴다. 나는 조카의 첫 딸을 업고 교회의 엄마와 아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사정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나를 늦둥이 엄마로 알았다. 그 아이가 지금 여섯 살이 되었다.


고3인 내 딸애가 조카의 아이들만 했을 때, 조카의 어머니(내겐 큰 시누)가 딸애를 돌봐주었다. 아기 땐 시어머니가 업고 기르다시피 했지만, 어머니가 집을 비우실 땐 언제나 딸애의 큰고모인 형님(큰 시누) 차지였다. 밖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어머니와 형님에게 아이를 맡기면 든든했다.

 

형님의 4남매들, 그러니까 내게 시조카 되는 넷은 모두 결혼했다. 그 밑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거나 여섯 살, 네 살이며 돌잽이가 있는가 하면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도 있다. 형님이 돌잽이 손주의 재롱에 번쩍 안아 올리며 활짝 웃었다. 시어머니에게는 외증손자, 그 나이 차이가 무려 90년이다.

 

음식을 다 먹고 빈 그릇을 싱크대 안에 집어넣자 조카며느리가 말했다.


"외숙모님, 설거지는 우리가 할 테니까 과일 좀 깎아 주세요!"


이쯤 되면 나도 조카며느리에게 자기 시어머니(큰 시누)와 격이 얼추 같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조카며느리들이 거품을 내며 그릇을 씻고 헹궈도 내 엉덩이가 느긋하다.


집안의 대표 왕할머니인 나의 시어머니 옆에는 큰사위 작은사위가 앉아 있다. 우리 3동서도 식탁에 모여 앉았다. 과일과 차를 먹을 때쯤 해서는 이렇게 또 격이 나눠진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세대교체는 분위기로 확실히 자리를 잡는 것 같다.


태그:#세대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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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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