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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여성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시대의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공부를 잘해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정치·행정을 잘해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혹은 검술을 잘 익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혹은 수완이 좋아서 장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남자들의 경우에는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이 같이 전통시대에는 사실상 남자에게만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역사책에도 순전히 남자들의 이름만 기록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서 여자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책상 위에 참을성 있게 앉아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전통시대, 특히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서 여성이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일단 과부가 된 뒤에 열녀가 되는 것이었다.

파주문화원 홈페이지에 소개된 청풍김씨 열녀비. 동아시아 전통시대에 열녀라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그리고 가장 확실한 출세코스였다.
 파주문화원 홈페이지에 소개된 청풍김씨 열녀비. 동아시아 전통시대에 열녀라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그리고 가장 확실한 출세코스였다.
ⓒ 파주문화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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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만 되면 비문도 세워지고 가문 전체가 세제 혜택도 받고 지방 장관의 칭송도 들을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열녀 가문에 세제 혜택이 주어졌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한국의 경우에 어떠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그런데 과부라고 하여 무조건 열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열녀로 출세할 수 있는 과부는 따로 있었다. 밤마다 꾹 참으면서 바늘로 허벅지를 꾹꾹 찌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에 더해 특별한 노력이 추가적으로 요구되었다.

어떻게 하면 과부로서 열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려면, 명나라 때 허주부(許州府)라는 곳에 살았던 류씨 부인의 <출세기>를 살펴보면 된다. 허주는 오늘날 허난성(하남성) 중앙에 있었던 곳으로서 현재의 지명은 쉬창(허창)이다.

1540년, 그러니까 조선에서 중종 임금이 통치하던 때에 간행된 명나라의 지방지 <허주지>에 의하면, 1477년에 태어난 류씨는 원석이라는 젊은 생원에게 시집을 갔고 어린 아들을 하나 둔 상태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이후 그는 재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일단 과부의 대열에는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부는 자연적인 개념이고 열녀는 사회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열녀가 되려면 사회적 공인이 필요했다. 사회적 공인을 획득하려면, 보통 사람들은 도달하기 힘든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류씨 부인의 삶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1.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되었다(엄격한 자기관리): 그는 문을 닫아건 채 단절적인 삶을 살았다. 친척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혼자 사는 여자가 집밖에 자주 등장하면 유언비어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는 베를 주문받고 넘길 때의 필수적인 경우로 한정되었던 모양이다.

2. 열심히 베를 짰다(경제적 독립): 유교적 관념에서 볼 때에, 단지 재혼 않고 혼자 산다고 하여 수절과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적 파트너를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경제적 파트너를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컸다.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류씨 부인은 열심히 베를 짰다. 이것이 그에게 큰 소득을 안겨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들 하나를 키울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은 생겼던 모양이다. 사실, 과부가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지 못하면 다른 남자에게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과부로서 열녀가 되어 사회적 출세를 달성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3. 아들을 잘 키웠다(노후생활의 보장): 아들이 있어야 시집 족보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또 아들은 독신 생활의 심리적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이라는 존재는 확실한 노후보장책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딸도 잘할 수 있었겠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관념이다.

노후생활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면, 수십 년 넘게 가문을 지키기도 힘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열녀로서 출세할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위험성을 막는 것이 아들의 존재였다.

4. 채식으로만 35년을 살았다(이미지 관리): <지방지>가 편찬될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그때까지 그는 죽과 채소로만 끼니를 때우며 살았다. 적어도 외부세계에 알려진 사실은 그러했다.

이런 고통스러운 삶은 수절과부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 모티브를 제공했을 것이다. 과부의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어딘가 활력이 넘쳐흐르면 열녀의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5. 지부(知府) 장양지가 그를 칭송했다(지역사회의 공인): 1539년에 지부(부급 행정단위의 장관) 장양지가 류씨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행실을 칭찬했다. 춘절인 1540년 2월에는 그의 집에 '생원 원석의 처 열녀 류씨의 집'이라는 현판이 내걸렸다. 이후 그녀의 수절을 찬미하는 시인들이 나타났다. 

위와 같이 류씨 부인의 삶에서는 다섯 가지 특징 즉 ▲ 엄격한 자기관리 ▲ 경제적 독립 ▲ 노후생활의 보장 ▲ 이미지 관리 ▲ 지역사회의 공인이라는 '출세조건'이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 등에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을 출세시킨 과부'가 사회적 존경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동아시아 전통의 연장선상에 이해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사실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은 현대 여성들의 출세 조건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경우에도 자기관리나 경제적 독립 등이 사회적 출세에 꼭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출세조건'은 어느 시대나 다 비슷하지만, 전통시대에 여자의 경우에는 '출세코스'가 열녀 같은 한정된 루트로만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 오늘날과 다르다고 하겠다.

여성이 열녀라는 타이틀을 받으면 그 여성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에도 영광이 되었다. 하지만, 한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희생하는 조건 하에서만 사회적 출세를, 그것도 다 늙은 다음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성 개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열녀 표창을 받은 류씨 부인의 웃음에서는 쓸쓸함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건 간에 또 남자건 여자건 간에 사회적 출세를 이룩하려면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야 하겠지만, 이처럼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완전히 끊어야만 사회적 출세를 이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전통시대의 폭력성과 사회적 한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태그:#허주부, #여성, #출세, #동아시아, #전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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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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