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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도 구계등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과, 파도와 자갈들이 멋진 화음으로 들려주는 합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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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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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얼썩 쏴아, 처얼썩 쏴아. 자갈들아, 자갈들아, 뭍으로 올라가렴, 처얼썩, 처얼썩, 몰려온 거센 파도가 처얼썩 처얼썩, 자갈들을 밀어 올린다. 차르르르르 차르 싸르르르르 싸르 파도야, 파도야, 우리들도 따라갈래, 차르르르르 차르, 물결 따라 자갈들이 흘러내리고 싸르르르르 싸르, 미끄럼 타는 갯돌들의 애절한 속삭임 처얼썩 쏴아, 차르르르르 차르 처얼썩 쏴아, 싸르르르르 싸르 파도에 떠밀리는 것이 어디 자갈뿐일까 물결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어디 갯돌뿐일까 지나간 억겁의 세월이 빚은 아홉 계단 자갈밭 처얼썩 쏴아, 처얼썩 쏴아. 차르르르르 차르, 싸르르르르 싸르 자연의 손길로 연마되는 매끈한 돌멩이들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자갈들의 합창소리에 푸른 바다가 넘실넘실 맞닿은 하늘도 춤을 춘다. - 자작시 '완도 구계등에서' 모두
명사십리 해변을 떠나 다음에 찾은 곳은 완도읍 정도리에 있는 구계등 해안이었다. 일단 민박집에 짐을 풀고 찾은 구계등 해안은 정말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었다. 주차장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자 바위절벽과 역시 물속에 커다란 바위들이 솟아있는 바다엔 거센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활처럼 휘어진 해안선이 펼쳐진 뒤편에는 울창한 방풍림이 검푸른 빛깔로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싱그럽다. 숲과 바다 사이 해변에는 고운 모래 대신에 둥글둥글한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이채로운 모습이다.
해변의 돌들은 크기가 다양했다. 숲이 가까운 위쪽으로는 호박이나 수박덩이처럼 커다란 돌들이 널려 있고, 바닷물 가까운 아래쪽으로는 내려갈수록 돌들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었다. 모양은 크거나 작거나 하나같이 매끄럽고 동글동글한 모습이다.
동그랗고 커다란 돌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물가로 내려갔다. 그 물가엔 중년 부부 한 쌍이 양산 아래 나란히 앉아 추억이라도 찾고 있는지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바닷물은 중년부부의 모습과는 달리 평온한 모습이 아니었다.
넘실넘실 울렁거리며 몰려온 거센 파도가 자갈밭을 휩쓸고 몰아칠 때면 하얀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더욱 신비로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자갈밭을 휩쓸고 몰려온 파도가 부서지며 다시 바다로 밀려날 때는 차르르르르, 싸르르르르, 자갈 구르는 소리가 여간 감미롭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파도가 밀어붙여 쌓아 놓은 바닷물 가까운 곳의 자갈들은 경사가 상당히 심했다. 그래서 파도가 다시 아래로 밀려 내려갈 때는 작은 자갈들이 마치 파도를 따라 내려가며 미끄럼이라도 타듯 물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때 자갈들이 서로 부딪치며 미끄러질 때 나는 소리였다.
"이 소리 좀 들어봐?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네." 처얼썩 쏴아! 하는 파도소리와 차르르르르 자갈들이 흘러내리는 소리는 묘하고 멋진 화음으로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 차르르르르 차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싸르르르르 싸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정말 어디에서도 들어 본 기억이 없는 기막힌 소리야."
일행들이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도 아직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물속으로 조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수영복은 민박집에서 갈아입고 나왔기 때문에 바지와 윗옷만 벗으면 되었다. 그런데 물속으로 몇 걸음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어, 어, 이거 왜 이래."
순간 나는 파도에 떠밀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에서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같이 들어간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파도가 부딪쳐 오는 힘은 보기보다 상당히 강했다.
"아야야! 이건 또 뭐야?"
그러고 보니 물속에 잠긴 발등이며 종아리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강한 파도에 떠밀린 자갈들이 다리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이 해안의 수많은 자갈들은 이렇게 파도에 떠밀려 곱고 매끄럽게 연마되어 쌓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몰아치는 거센 파도는 끊임없이 계속 물속의 자갈들을 뭍으로 밀어올렸고, 파도가 부서지며 다시 밀려 내려갈 때는 또 끊임없이 많은 자갈들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흘러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자갈들 좀 봐요? 너무 예쁘잖아요?"
물속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물가에서 바라보다가 파도를 피해 물러서 있던 친구 아내가 작고 고운 자갈 몇 개를 손에 들어 보인다. 자갈들은 매끈매끈하게 생긴 것이 모양이 예쁠 뿐만 아니라 빛깔도 참 고왔다.
현지 완도주민들이 '짝지'라고도 부르는 이 정도리 구계등 해안은 폭이 80여m에 길이가 800여m의 넓고 긴 해안선에 바둑알처럼 작은 자갈에서 수박만 한 크기의 갯돌들이 해변 가득 널려 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구계등(九階蹬)이라는 이름은 해안의 넓은 자갈밭이 9층계의 계단처럼 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4~5 계단 정도였다. 나머지 계단은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 해안가와 완만한 바다 속까지 이어진 아홉 층계의 동글동글한 자갈밭, 신비로운 이 바닷가의 풍경과 파도와 자갈들이 멋진 화음으로 들려주는 합창은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이 빚어 만든 걸출한 작품이었다. 우리들은 파도가 무서워 깊은 곳으로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물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술래잡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는 자갈밭 가운데에는 넓게 가지를 드리우고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해변을 찾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그늘과 쉼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돌아 나올 때는 해안의 방풍림 숲 속 길을 걷기로 했다. 그런데 이 방풍림도 대단한 것이었다. 숲 속에 들어서니 우거진 숲에 빛이 가려 어두컴컴하다. 이 방풍림은 해송을 비롯하여 감탕나무, 가시나무, 느티나무, 생달나무, 졸참나무, 소사나무, 상동나무, 예덕나무, 갈참나무, 개서어나무, 등 남쪽지방 특유의 상록수와 참나무, 태산목, 단풍나무 등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산책로 중간에 군데군데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어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제격인 이 방풍림은, 신라 흥덕왕 3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을 때 주민들로부터 구계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신라 궁중에서 이 지대를 녹원지로 봉하였다고 한다. 다시 입구로 나와 바라보는 바다는 여전히 바람이 거세어 출렁이는 바다와 함께 멀리 바다와 맞닿은 하늘까지 뒤뚱뒤뚱 춤을 추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 구계등 해안은 윤대녕의 단편소설 <천지간>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으로, 그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몇 개의 섬들과 작은 고깃배들이 그리움처럼 파도 속에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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