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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7월 2일, <태왕사신기>와 관련된 한 편의 기사가 많은 누리꾼들을 분노시켰습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표절 아니다"> -연합뉴스, 2006년 7월 2일자 기사-

<태왕사신기>는 이미 제작단계에서부터 표절 시비가 있었습니다. 김진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표절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일부 누리꾼들은 "<태왕사신기>는 대본을 수정하느라 제작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전개했던 적이 있었죠.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을 소재로, '의인화'된 4신이 자신이 선택한 왕을 중심으로 '부도'를 지향한다"는 내용의 만화죠. 사실,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가 유사한 면은 있어요. '대무신왕'을 '광개토대왕'으로 바꾸면 시놉시스는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누리꾼들은 "<바람의 나라>는 이미 연극이나 게임으로도 제작된 유명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태왕사신기> 제작진이 만화가에게 줄 '개런티'가 아까워 판권을 사지 않은 것이 아니냐"이라는 의혹을 꾸준히 전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3단독 허성욱 판사)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많았습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 편들어주면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해버린 판결"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요? 재판부가 그런 판단으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것일까요? 언론들이 "표절 아니다"라고 내걸었던 기사, 과연 판결문을 제대로 읽고 판단한 것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판사의 판결문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한 판결 내용은 "고소 시점이 너무 빨랐다"

결론부터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재판부는 "표절이 아니다"라고 확정지어 내린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판결문의 일부를 봅시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종합하면, 아직 시놉시스 단계에 불과한 피고의 이 사건 저작물을 상대로 원고가 이 사건 소를 제기한 것은 조금 성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원고의 저작물인 바람의 나라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보기에는 피고의 저작물인 이 사건 시놉시스는 그 내용과 형태에 있어서 아직 최종적이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단계의 것이고, 아직 시놉시스 단계에 불과한 피고의 저작물에 사신의 개념 사용 등 일부 원고 저작물에서 표현된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이를 두고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 및 원·피고 본인들이 얻게 되는 사회적 편익이 그에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에 비해 더 크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원고로서는, 피고가 실제로 이 사건 '태왕사신기'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그 내용대로 드라마가 제작되는 경우에 그것을 상대로 저작권침해여부에 대한 판단을 구하더라도 자신의 권리구제에 그다지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요약하면, "고소 시점이 너무 빨랐으며, 시놉시스는 최종 완성 저작물이 아니기에 표절 여부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현재의 시나리오 그대로 드라마가 제작된 시점에서 원고가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했다면, 권리 구제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판결을 보도한 언론 기자들은 판결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 기사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이 부분은 해당 판결문의 끝부분에 나온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봤으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부분임에도 경솔하게 판단해 기사를 작성해버린 것입니다.

재판부는 당초에 "'고구려 시대'라는 역사적 사실은 개인이 저작권을 주장하기 어려운 '공공재'에 가까우며, '4신'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도 만화가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이미 신화나 설화를 통해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합리적 근거를 제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김진 작가도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4신'의 개념을 캐릭터화(의인화)하면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상관관계에 대한 창작을 삽입했다면 저작권 존재는 타당하다"고 전재합니다. 그 '독창성'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반복합니다. "표절이 아니다"라는 판결이 아니라, "드라마 제작 시기까지 기다렸다가 판단했어야 한다"는 판결이었던 것입니다. 김진 작가로서는, 좀 더 참을성 있게 지켜보다가 판단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진 작가의 주장대로 표절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그 시점에서의 소송은 실패가 뻔한 자충수였던 것입니다. 표절이 사실이었다면, 오히려 누리꾼들의 주장대로 "대본을 수정할 시간"을 제공해버린 고소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물론 "의인화된 4신이 '왕'을 돕는다"는 핵심 설정에 있어서는, 여전히 '표절'에 무게를 둘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재판부도 "현재의 시나리오 그대로 드라마가 제작된 시점에서 원고가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던거죠. 재판부는 결국 김진 작가에게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태왕사신기>는 그런 이유로, <바람의 나라>와의 '표절 시비'에 대해 결코 당당한 포지션을 취할 입장이 여전히 못됩니다.

<태왕사신기>의 '독창성'은 어디로?

두달 전에 판결났던 2심에서는 아예 '시놉시스'를 '아이디어' 부분으로 한정시켜 "표절이 아니라"는 판결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정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실제로 긴 시간을 끌며 공개된 현재의 작품에서도 유사한 흔적이 꽤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2심 판결이 좀 미심쩍은 면도 있긴 합니다.

<태왕사신기>는 그런 이유로, <바람의 나라>와의 ‘표절 시비’에 대해 결코 당당한 포지션을 취할 입장이 여전히 못됩니다.

<태왕사신기>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환웅'으로 분한 배용준에게서 영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배용준은 2회 방영 이후부터 '욘달프'로 불리더군요. 하지만 일부 눈썰미 예리한 시청자들은 다른 캐릭터를 거론했습니다. 어떤 캐릭터일까요? 예, '레골라스'입니다. 사진 자료 보시면 알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레골라스'와 지나칠 정도로 흡사합니다.
▲ '욘달프'? 아닙니다. '욘골라스'에 가깝습니다. <반지의 제왕> '레골라스'와 지나칠 정도로 흡사합니다.
ⓒ iMBC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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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해보시길 바랍니다.
▲ <반지의 제왕> '레골라스' 비교해보시길 바랍니다.
ⓒ 뉴라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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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장면 보는 순간, 흡사하다는 생각에 움찔해버렸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의 방어막 'AT필드'도 연상시키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뿐이 아닙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지적했고, 언론에서도 다루었던 것처럼 최민수의 '대장로'는 그 유명한 <스타워즈-제다이의 귀환>에서 엿보았던 적이 있는 '다스베이더'와 흡사합니다.

그뿐이 아니죠. 총체적으로 <반지의 제왕>입니다. 음악이라든지, 돌로 된 원탁에서 촌장을 선출하는 현무족 사람들의 모습, 누가 보면 <반지의 제왕> 오마주 작품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오마주'라는 용어는 엄격히 말해 "후배 영화인이 선배 영화인의 기술적 재능이나 그 업적에 대한 공덕을 칭찬하여 기리면서 감명깊은 주요 대사나 장면을 본떠 표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니면, 작품 간의 뚜렷한 연결고리라도 있어야 하지만 '신화'를 영상으로 소화했다는 점을 빼면, 그것도 아닙니다.

<태왕사신기> 제작진은, 젊은 누리꾼들 중에 어지간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섭렵한 이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아니, <반지의 제왕>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굳이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감상했던 작품들입니다.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거든, 장면의 유사성이 엿보였을 때 재검토했어야 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봐야 웃음거리 밖에 되질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과의 유사성, 왜 그랬을까

김종학 PD는 지난 6일에 열린 <태왕사신기> 기자시사회에서 "제작 초기에 '반지의 제왕'팀(비리지트 버크의 특수효과팀)을 초빙해 작업했지만, 주로 영화 쪽 일을 한 그들의 시스템이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을 완벽하게 갖춘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과 달리 우리는 그때 그때 순발력을 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생기기도 해 결국 함께 하지 못했다. '태왕사신기'는 순수 한국 CG기술로 만들어졌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4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을 연출하면서 '순발력'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 자체가 아이러니죠.

이 '순발력'이라는 단어, 어쩔 수 없이 <바람의 나라>와의 표절 시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순수 한국 CG 기술'로 만들었다지만, '충돌' 과정에서 받아들인 것은 많았나 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태왕사신기>, 험난하다

당장이야 2회분 시청률이 26.9%로 집계되면서 '대박' 예감이 밀려오는 듯하지만, 앞서 언급한 '창의력 부족'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는 한은 그 '대박'이 얼마나 갈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바람의 나라>와의 표절 시비, 그리고 재판부는 언론 보도와는 달리 <태왕사신기>를 일방적으로 편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바람의 나라> 팬들은 정면대응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태왕사신기>와 <바람의 나라>와의 유사한 설정을 치밀하게 거론하고 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든다면, '청룡'이 시력을 잃는다는 설정. 그거 이미 <바람의 나라>에서도 등장했던 설정입니다.

그뿐일까요? <바람의 나라>에서는 폭주하는 '진짜 청룡'을 달랠 수 있는 이는 '무휼(대무신왕)'로 처리했던 적이 있는데, <태왕사신기>에서는 "'흑주작'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있다"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아마 '담덕'이겠죠.

그런 판에, 수백만 관객이 지켜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차용해 보여줬으니, "험난하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듯합니다.

<태왕사신기>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까요? 배용준의 연기도 기대 이하였고, 심지어 문소리의 연기까지 굳어진 듯 국어책을 읽는 기색이 강했습니다. 최민수의 연기가 강렬했지만, 이미 영화 <홀리데이>에서 보여줬던 색채의 연기죠. 연기에서 기대할 부분도 크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누리꾼들의 다양한 거론은 그렇듯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태왕사신기>는 이런 상황을 결코 좌시할 때가 아니라는 것, 확실하게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태왕사신기, #욘달프, #바람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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