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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는 9월 13일자에 신정아씨의 누드사진이 여러장 발견됐다며 이를 입수에 3면에 게재했다.
 문화일보는 9월 13일자에 신정아씨의 누드사진이 여러장 발견됐다며 이를 입수에 3면에 게재했다.
ⓒ 문화일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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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의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 게재는 생각할 수록 미스터리한 일이다.

변양균씨로 압축되는 청탁 비리와 그 누드 사진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했다고 해도,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미친 거야?"라고 어이없어한다. 언론연대 양문석 사무총장은 "<문화일보>는 인격살인자 도색잡지다"라고 선언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문석씨의 "살인자"라는 표현이 크게 무리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일보>는 정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일까.

미친 <문화일보>, 새삼스럽지 않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일보>는 원래 그랬다. 나는 이번 사건이 몇몇 기자 혹은 데스크의 '판단 미스'가 일으킨 돌출적인 사건이었다기보다는 이미 문화일보의 행보 속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강안남자>같은 포르노 소설을 연재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문화일보는 한국 성인 남성들의 도색잡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뿐 아니다. 2002년 지하철, 버스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문화일보> 광고에는 신문을 쫙 펼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와 그 여자를 둘러싸고 호기심에 가득 찬 남성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 광고의 메인 카피는 "보고 싶다 문화일보"였다. 이 남성들의 시선을 '지적 호기심'으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일보>는 원래 성인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 일간지였다. 단지 이번에 문화일보는 도상과 상징적 의미체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엄연히 살아있는 한 존재를 말 그대로 벌거벗기는데 서슴없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들의 행각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라는 낡은 분석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운 문화적 충격이기도 했다.

도색적이어서 나쁜 게 아니다. 모든 도색잡지는 나쁜가. 성적 호기심이 천박하고 지적 호기심은 고상한가.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문화일보>를 '인격살인자 도색잡지'라고 하는 것은, 속은 후련하지만 타당한 표현은 아니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문화일보>는 여성에게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잊음으로써 남성의 성충동을 옹호하는 여성혐오 남성숭배 잡지다. 그렇기 때문에 '도색잡지'라는 비난, '인격살인자'라는 비판은 일견 타당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문화일보> 연재 소설 '강안남자'.
 <문화일보> 연재 소설 '강안남자'.
ⓒ <문화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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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남편의 아내, 그리고 싱글여성

우리는 권력자인 남자들이 도덕성의 위기를 겪을 때 종종 그들의 아내들이 등장하여 부동산 투기와 해외 원정출산, 자금 도피 등의 비리에 대해 남편이 모르게 자신이 독자적으로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듣곤 한다.

여자들은 자신의 사적 관계-남편과 아이의 이해관계-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원래 공적이지 않은 존재라고 쉽게 간주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 관계를 가지지 않은 여자의 경우, 다시 말해 싱글 여성의 경우, 이 여성은 그 존재 자체로 공동체의 공/사영역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 결과 공동체를 위기에 빠트리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된다.

변양균씨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사청탁 등의 권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비난당해 마땅하지만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이들도 꽤나 많다.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동료를 팔아넘기고 여자를 갖다 바치는 남성들의 아부는, 직접 자기 몸을 갖다 바치는 여성들의 아부보다 도덕적으로 덜 경멸당한다. 그리고 여성들의 승승장구에 언제나 따라붙는 '성 로비' 의혹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여성의 성공 자체에는 뭔가 구린 뒷거래가 있다는 남성들의 피해 의식을 증폭시킨다.

바로 여기에 <문화일보>가 저지른 악행의 핵심이 있다. <문화일보>는 신문으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인 정보를 전달하고 독자에게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포기하고, 그들 스스로 가부장적 입법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공동체를 위기에 빠트린 위험한 여자의 누드 사진을 입수한 순간, 그들은 남성의 입장에서 스스로 복수를 자행한 것이다.

14일, <문화일보> 선정보도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문화일보>를 찢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14일, <문화일보> 선정보도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문화일보>를 찢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안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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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을 대신한 <문화일보>의 복수

만약 신정아씨가 이성애자 남성 로비스트였다면, "변양균씨 정도가 배후라면 널렸다"라는 말은 변씨 배후에도 엄청난 네트워크가 있다는 말로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공개된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은 이 말의 내용을 변환시킨다. 변양균씨는 자기 지위를 걸고 쏟아부은 사랑을 이용당한 남자가 되었고, 신정아씨는 희대의 꽃뱀사기꾼이 된다.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 게재를 통해 변양균씨는 권력형 비리중개자로서가 아니라 공인으로서 부적절한 사적 관계를 맺은 존재로 소환되고, 신정아씨는 권력형 비리의 원인을 제공한 청탁자가 아니라 몸을 바쳐 공인이 되려고 한 부적절한 욕망을 가진 여성으로 재명명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이 <문화일보>가 신정아씨의 누드를 '특종'이라는 이유로 1면에 게재한 '감정'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문화일보>의 누드 사진 게재는 선정적이라는 성보수적인 이유로도, 한 사람의 인격과 사생활권을 침해했다는 인격권의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문화일보>는 스스로 심판자과 집행자가 되어 남성들에게는 "여성의 유혹에 당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여성들에게 "권력을 욕망하면 이 꼴이 날 것"이라는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바로 이 점이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점이다.


태그:#신정아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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