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온다>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백가흠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자극적인 소재와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소설집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작가가 최근에 두 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를 선보였다. 이 소설도 <귀뚜라미가 온다>에 이어서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푸짐하게 펼쳐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매일 기다려’와 ‘웰컴, 베이비!’, ‘굿바이 투 로맨스’다. ‘매일 기다려’는 가난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집 없는 소녀를 거두면서 시작한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뭔가 대가를 요구할 거라 생각하지만 할아버지는 무조건적으로 소녀에게 잘해준다. 친손녀를 대하듯이 말이다. 이런 설정이라면, 소설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법 한데 저자는 다르다. 소녀는 친구들을 불러들이고 그네들은 할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할아버지는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소녀와 함께 이사가려하지만 그런 희망은 비웃음을 살 뿐이다. 할아버지의 희망은 물론 독자들의 바람도 짓밟는 소설이 ‘매일 기다려’다. ‘웰컴, 베이비!’는 제목과 달리 ‘굿바이, 베이비!’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 속의 누군가는 자식을 버린다. 누군가는 남들의 정사 장면을 훔쳐본다. 누군가는 염치없이 누군가의 호의를 이용하려 한다. 또한 누군가는 자살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몰래 구경한다. 차갑기만 한 소설, 날카롭기만 한 소설이 바로 ‘웰컴, 베이비!’다. ‘굿바이 투 로맨스’는 <귀뚜라미가 온다>의 주요 이미지들을 혼합한 듯한 소설로 폭력이 등장한다. 남자는 두 명의 여자를 억압하고 때리고 모욕한다. 여자들은 대처할 방법이 없다. 남자는 치사한 수법으로 여자들의 약점을 잡아서 끝없이 억압하려 한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이미지와 많이 비슷한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그 비슷하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 두 명의 여자가 주저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끝단락에 있는 “남자가 주려 한 치욕스러움은 실패로 돌아간 듯 했다”는 문장에서 보이듯 더 센 폭력이 올 것을 알더라도, 그녀들의 눈에서 빛은 사라지지 않는 듯 하다. 백가흠의 소설에서 다소 의외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소설집에서 이런 장면들이 조금씩은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표제작 ‘조대리의 트렁크’는 악몽 같은 현실에 둘러싸여있음에도 그속에서 순박함을 잃지 않는 ‘조대리’를 등장시켜 그것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조대리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폭력성만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에도 착해서 바보스럽게 보이는 그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가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은 또 무엇일까? 더욱이 표제작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추측을 해본다. 저자는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도 써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귀뚜라미가 온다>와는 다른 소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을 써보려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저자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본다. 너무나 강렬했기에 인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지를 굳혀버린 <귀뚜라미가 온다>와는 다른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알려준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계간지에 발표한 순으로 따지면 ‘조대리의 트렁크’는 비교적 앞선 때에 쓴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백가흠이라는 이름을 지닌 작가가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능청스럽게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대리의 트렁크>는 비록 많은 부분이 ‘세다’고 할지라도, 따뜻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작품만 놓고 본다면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데뷔작에 비하면 그런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백가흠 소설의 또 다른 재미를 확인시켜주는 <조대리의 트렁크>, 작가를 넘어서 한국소설의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계기로도 한 몫을 해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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