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빈 속으로 달리다보니 무척이나 배가 고팠습니다. 저녁 8시가 되도록 또 저녁을 챙기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젠 물마저 떨어졌습니다. "아니, 젊은 총각. 그거 돈 좀 아끼지 말고 사 먹지 그래! 고생도 좋지만 먹은 데는 아끼지 말라구. 나이 들어봐. 나중에 고생해!" 네, 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조언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크!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사막 한 복판이라는 걸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자전거 여행의 역경지수를 높이기 위해 대책 없이 사막으로 들어와 버린 겁니다. 여름이라고 해도 이제 날은 제법 어둑어둑해져 있습니다. 패니어엔 겨우 땅콩 부스러기와 어디에 발라먹어야 될지 모를 딸기잼만 있을 뿐입니다. 자, 이제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저기 봐 별똥별이야!"
같이 야외 인공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소녀가 놀라워하며 소리칩니다. 한 시간 동안 하염없이 눈망울로 떨어지는 별가루의 매력에 취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제 눈에도 꼬리달린 슈팅스타가 확연히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콜로라도의 밤하늘은 아무리 무뚝뚝한 인간이라도 로맨틱 감성을 자극당할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미국의 어느 주보다도 말입니다.
탕 안에는 남녀 세 명과 유일한 동양청년인 나, 이렇게 7명이 있습니다. 모두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로 기대어 낭만에 푹 빠져 미소 지을 때 그보다 더 지독한 감상주의 젖은 솔로인 난 혼자만 괜시리 그렁그렁 눈물이 맺힙니다. 이 상대적 박탈감…. 가족, 연인, 아니 친구, 아니 정말로 내가 아는 아무라도 설사 원수라 해도 이 장면을 같이 누리고 싶은데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건 내가 받은 절망과 상처가 아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누지 못할 때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이유가, 더 이상 그분들과 나눌 수 있는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삶들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듯 말이죠.
콜로라도 산맥 깊숙한 모텔에서 이탈리안들이 주류를 이루는 파티에 초대를 받은 뒤 동굴탐험과 캠프 파이어 등으로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유일한 동양인에 유일한 솔로라 저도 모르게 외로움을 탔는지 그 낌새를 눈치 챈 많은 친구들이 마음 문을 열어주어 생각 외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네요.
그리고 다음 날은 지난 번 그 미스터리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을 만나 숙박 등 모든 시설이 무료로 오픈된 교회에 관한 자초지종을 들어보았습니다. 역시나 지난 번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그대로더군요. 그 마인드가 부러웠습니다. 누군가의 침입 때문에 마음 졸이는 게 아닌 누군가의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을 공유하며 마음을 같이 나누는 모습.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그 카스테라, 제가 먹을 걸 그랬습니다. 하하, 농담입니다.
이후에 듀링고로 가서 오토바이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번쩍번쩍 화려한 치장을 한 수백 대의 고급 오토바이 사이를 무명 자전거가 지나치니 사람들 시선이 오히려 나에게 몰려옵니다. 특별한 행사는 없는지 그저 각양각색의 바이커들이 모이고 즐기는데 의의를 두는 것 같습니다. 대목이라서 그런지 가장 싼 하룻밤 숙박요금이 $118이라 체념하고 대신 숙소를 알아봅니다. 젊은 멕시코 친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침대를 제공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듀링고를 떠납니다. 록키산맥을 거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3시간을 자전거를 밀고 올라갑니다. 겨우 10마일(16km) 전진했군요. 하지만 보상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이후로 장장 80마일 정도를 평탄하거나 혹은 내리막길로 달렸습니다. 하긴 2000m 이상에서 지면으로 내려오려니 그럴 수밖에요. 지금까지 록키산맥에서 고생한 일주일을 다 보상 받은 느낌입니다.
지난 록키산맥 사고로 치료 받은 애마 로페카(Ropeca, '위로하는 자'란 뜻의 히브리어)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고 시속 70km로 바람을 헤치며 도로 위를 날아다닙니다. 사실 굉장히 스릴 있으면서도 위험한 순간입니다. 바람이 적잖게 불고 있었으므로 다운힐 때에는 등골이 오싹해져 옵니다. 그러나 이미 온 몸의 신경이 방향조절과 균형에 맞추어져 있었기에 브레이크 조절은 차선책으로 밀려납니다. 여태껏 4000km 넘게 달린 덕택에 교체하지 않은 뒷 타이어가 낡았으며, 도로에 가끔 파인 홈이 있어서 섣불리 브레이크를 잡았다가 어떻게 힘의 조절이 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지요.
점심도 챙기지 못해서 덴버에서 가지고 온 말린 소고기 육포를 2주 만에 처음으로 꺼내 먹었습니다. 짜고, 또 먹고 나면 목마르고 해서 안 챙겨 먹었었는데 턱이 조금 얼얼한 거 빼고는 그런대로 먹을 만합니다. 어차피 짐가방에 먹을 것은 그것 밖에 없었고요.
원래는 록키산맥 끝자락인 코테즈(cotez)에서 머물고 내일쯤 포 코너스(Four corners :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유타 주가 한 지점에 모여 있는 곳)를 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바람에 계획을 수정합니다.
오후 5시. 하늘에서 또 천둥번개가 칩니다. 그리고 내 앞으로 파란 하늘과 황무지 뿐인 사막이 보입니다. 드디어 사막 입구에 온 것입니다. 생전 처음 사막을 보니 지금까지 본 어떤 절경보다 더 신기해 감탄하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댑니다. 앞으로가 사막인지라 몸을 추스르고 다시 사막과 마을의 경계선인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하다 그냥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뒷바람이라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지원군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다운힐이야 업힐 다음에 당연히 따라오는 인지상정의 결과물이라지만 뒷바람은 라이더에게는 드문 천운입니다.
사막이라 마을이 없고 따라서 숙소가 걱정이긴 했지만 '젊음이란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한 번쯤은 대책 없이 도전도 해 봐야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철없이 태연자약하다니! 그리하여 모든 상황을 뒤로한 채 푸른 하늘 사막속으로 돌진합니다. 5시였지만 뜨거운 사막으로의 모험, 그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점철된 유혹은 정말이지 거부하기 힘들었습니다.
뒷바람을 타고 거기에 다운힐이니 거칠게 없습니다. 어기찬 기개로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쭉쭉 계속 나갑니다. 드디어 사막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 이 감격, 흥분, 로망! 도로, 날씨, 풍경 모든 조건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상입니다. 눈을 씀벅이며 바라본 포 코너스로 가는 160번 하이웨이의 풍경은 너무나도 황홀합니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내가 지나온 길을 고개 돌려 수십 번을 돌아봅니다. 아직 그랜드 캐년도 모뉴먼트 밸리도 안 갔는데 시작부터가 최고네요.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올드 팝이 흐르니 무릉도원이 내가 달리고 있는 지금 이 곳이라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가슴 속을 가득 메웁니다. 마치 황금 소로를 달리는 기분입니다. 눈부신 석양에 비춰진 사막이 금나라처럼 보입니다.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의 길은 지옥길(Hell way)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5시 이후에 이곳은 황금의 땅(Golden land)으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막의 주체적 변용은 나에게 감상적인 합리화를 만들어 냅니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지는 것" - 파울로 코엘료
참새 같은 마음으로는 결코 독수리가 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날아간 화살은 거꾸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독수리 날개 치며 비상하듯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또 현재를 즐기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주의로 나갑니다.
기분도 좋고 속도도 탄력을 받아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포 코너스에 왔지만 해가 저물어갑니다. 포 코너스엔 공식적으로 텐트를 칠 수 없었기에 눈도장으로 확인만 한 후 다시 콜로라도 쪽으로 1km정도 내려와 텐트를 쳤습니다.
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사막 한 가운데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부실하다 하지만 텐트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만 이곳의 땅은 보드라운 모래이기 때문에 텐트치는 데 여느 때보다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텐트를 쳤으니 식사를 해야겠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저녁을 굶었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쫄쫄 굶으며 배고픈 자가 논하는 인생을 언젠가 추억담으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음 날 여정을 생각하니 식사를 건너 뛰어서는 안 되겠단 위기감이 엄습해 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텐트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도로에 나가 손을 흔들기로 했습니다. 이미 달님이 문안인사 온 밤이었으므로 손전등을 들고 말이지요.
저기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아른거립니다. 사막이긴 했지만 몇 분에 한 대 꼴로 차가 이동 중이었기에 도움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참으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한 대의 차가 서더니 간격을 두고 뒤따르는 차들도 추월하지 않고 그대로 서는 겁니다. 얼마든지 차선 변경해서 갈 수 있는데도 말이죠.
앞 차에게 사정을 설명할 때까지 뒤에 있는 차들은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첫 차에게서 물과 쿠키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차에선 상황을 금세 알아채고 음료를 줍니다. 세 번째 차는 아예 상황을 미리 간파하고 음식물 봉다리를 통째 건네 줍니다. 일순 풍족해진 나는 뒤에 두 차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들을 그냥 보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뭘 도와 드릴까요?" "필요한 게 뭡니까?" 그들은 모두 밤중에 사막에 홀로 남겨진 내 걱정을 했습니다. 때론 음식을 찾기 위해 차 구석구석을 뒤지기도 합니다. 그냥 가는 차들도 행운을 빈다며 격려해 줍니다. 그들이 건네준 그야말로 정 넘치는 전리품들을 받아들고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텐트 안에서 체면 무릅쓰고 도로에 뛰어들어 획득한 전리품들을 보니 광야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사막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저 눈에 보여지는 현상일 뿐,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접촉점은 황량한 사막에서조차도 사랑의 기운을 통해 갈증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줍니다.
사막 한 가운데 친 텐트는 무장해제상태입니다. 그런데 가끔 천둥이 칩니다. 그럴 때마다 섬뜩하지만 설마 사막에 비가 오겠냐고 스스로 배짱을 부려봅니다. 그러면서 다 잘 될 거라고 자기 충족적 예언을 되뇌입니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사막에서 비가 오면 그건 명백한 반칙이라고 우길 심산입니다. 따질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도 사막에서 첫 야영이라 그런지 흥분되고 불안한 마음 감출 수 없습니다. 일단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먹고 보자는 생각에 도로의 양심 전리품을 막무가내로 해치웠습니다. 랜턴도 켜지 않은 상황인지라 이 어둠 속에서 우적우적 씹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배도 불렀겠다 긴급공수 받은 식수로 양치를 하고 발도 씻었습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청결조치입니다.
여유를 찾고 텐트 문을 열어봅니다. 그리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보니 2086개의 별들이 불을 켜고 재잘거립니다. '어? 별똥…'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별똥별을 가장한 비행기 불빛이 별들 사이를 헤집고 다닙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마치 모든 걸 다 얻은 느낌입니다.
하루 동안의 노곤함이 금새 평안함으로 바뀌는 건 졸린 가운데 느껴지는 감정이고요. 내일 아침 텐트를 박차고 나왔을 때 대관절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으니 만사 뒤끝이 좋습니다. 큰 하품 한 번 하고 나면 동트는 기쁨을 맛보겠지요. 이것이 비전 노마드의 삶!
"사막에 텐트를 쳐라, 그리하면 내일의 황금 태양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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