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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들과 함께 세물 고추를 땄다. 땀의 결실의 기쁨을 누렸다.
 아내, 아들과 함께 세물 고추를 땄다. 땀의 결실의 기쁨을 누렸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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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라서 그런가? 하얀 천으로 띠를 펼친 듯 산허리를 휘감은 구름이 환상적이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진강산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내민 태양이 눈부시다.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기분이 상쾌하다. 아내가 마당에 나와 기지개를 편다. 맑은 하늘만큼이나 얼굴 표정이 밝다.

"당신, 고추 따느라 힘들었지?"
"몸이 뻐근하기는 한데…."
"바깥바람 쏘여 콧물이 더 흐르는 거 아냐?"
"일한다고 그러나요? 암튼 기분은 좋아요."

밀린 일을 마무리 지어 홀가분한 느낌이랄까, 아내는 고추를 넉넉히 따고나니 마음이 흡족한 모양이다.

사실, 요즘 아내는 알레르기 코감기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환절기만 되면 고생을 하는 연례행사이다. 눈이 가려워 안약을 넣고, 줄줄 흐르는 콧물 때문에 휴지를 끼고 산다. 가을 들어 좀 심한 편이다.

아내는 할 일을 미루지 못하는 성격이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고추를 따느라 무진 애를 썼다.

고추 따는 날... 아내와 아들이 합세하다

붉은 빛을 토해놓은 고추. 땀의 대가이다.
 붉은 빛을 토해놓은 고추. 땀의 대가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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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16일). 우리는 고추를 땄다. 두물 따고, 세물째이다. 두물 따고 3주가 지나 때늦은 감이 있었다.

요즘은 해가 짧아 오전 6시가 되어도 어둑어둑하다. 6시 30분이 넘어서자 밖이 훤해졌다. 마을 스피커를 타고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잠에서 깼다.

"여보, 웬 노랫소리일까요?"
"이장님이 마을방송을 하려나 봐."

우리 동네 이장님은 마을방송을 할 때 전할 말을 하기 전, 노래를 한 곡씩 틀어준다. 들려주는 노래는 만날 그 가수에 그 노래이다. 그래도 한 곡을 끝까지 들려준다. 이제 설운도씨가 부른 '원점'이라는 노래는 가사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방송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문 밖으로 나와 귀를 기울인다.

꼭두새벽에 무슨 전할 말이 있을까?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과 함께 농작물 관리를 잘 하라는 당부다. 농협에서 전하는 소식도 대신 전한다.

노랫소리와 이장님의 목소리가 잠에 빠진 동네를 깨운다. 구성진 노래가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고도 남는다.

아내와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부터 쳐다보았다. 잔뜩 흐린 날씨지만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고추 따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온통 붉은 빛의 고추밭이 꽃이 핀 것처럼 예쁘다.
 온통 붉은 빛의 고추밭이 꽃이 핀 것처럼 예쁘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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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슬이 걷히지 않았다. 물기 머금은 고추밭이 온통 붉은 빛이다. 녹색의 고추밭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꽃처럼 예쁘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부터 키 자라는 힘을 씨 맺는 데 쏟아서일까? 따야 할 고추가 숱하다. 지난주에 땄어야 할 것을 고향에 벌초하러 가느라 일주일 미룬 것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도 집에 왔는데 거들었다. 노상 늑장을 부리는 녀석이 이른 아침 눈을 비비고 나왔다. 팔을 걷어붙이고, 밀짚모자까지 쓴 폼이 영락없는 농사꾼차림이었다.

"아버지, 고추가 힘없이 따지네요. 전번보다 따기가 쉬워요."
"그렇지? 고추도 절기를 알아보는 모양이야."

아들 녀석이 손을 잽싸게 움직였다. 일머리는 모르지만 소중히 알고 일손을 거들려는 마음이 기특하였다.

달린 게 많으면 힘도 덜 든다

아내도 열심이었다. 코감기 때문에 목에 수건을 두르고,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아들을 앞서나갔다. 경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지금도 고추밭에는 한창 하얀 고추꽃이 피고 있다.
 지금도 고추밭에는 한창 하얀 고추꽃이 피고 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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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추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아름답다.
 하얀 고추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아름답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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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고추꽃이 또 한창이네. 지금 핀 것은 붉어지지 않지?"
"그럴 거야. 서리 내리기 전 풋고추나 따먹는 거지."
"좀 일찍 피었으면 더 많이 딸 건데."
"이사람, 우리가 거둔 것도 얼만데 욕심을 또 부려!"

하기야 우리 실력에 이만큼이면 감지덕지지! 소독하는 것도 게을렀고, 한 며칠 나 몰라라 놔두었더니 밭고랑에 자란 풀도 무성하지 않은가. 아내도 더 이상의 욕심은 지나치다며 말을 거두었다.

고랑에 풀이 자랐지만 붉게 물든 고추가 탐스럽다.
 고랑에 풀이 자랐지만 붉게 물든 고추가 탐스럽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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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농사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전문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자칫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느 작물에 비해 병치레가 많은지라 한눈을 팔면 순식간에 망가지기도 한다.

며칠 전, 옆집아저씨가 고추를 따며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전 올처럼 고추농사 지어보기는 처음이네! 뭐 딸 게 있어야지! 땅이 질어 역병에 녹아나고, 또 탄저병이 돌아 상품가치는 떨어지고. 내년부턴 고추농사를 때려치워야 하나 어쩌나!"

옆집은 해마다 3000주 남짓 고추농사를 짓는다. 아저씨는 스스로 고추농사에 관한 한 박사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올 농사는 시원찮다. 기대한 수확량이 절반도 못 미칠 거라고 한다. 거기다 가격까지 헐하니 시름이 많다.

농사가 잘 되면 수확할 때 신이 난다. 값까지 실하면 더하다. 수확의 기쁨에 고단한 일도 힘든 줄 모르고 한다. 농부들이 흘린 땀의 대가가 보람으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까지 붉게 물들이며 느낀 수확의 기쁨

해가 따갑지 않아 일하기가 한결 수월하였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달린 붉은 고추가 힘이 덜 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들 녀석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어머니, 밥 먹고 합시다!"
"녀석아! 난 고추만 봐도 배가 부르는데, 그렇게 힘들어!"
"지금이 몇 시야? 1시가 넘었잖아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저 따고 먹자."

아내가 채근을 하자 아들도 군소리를 접으며 손놀림이 더 빨라진다. 12고랑 800여 주를 셋이서 마치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고추 따는 일은 아주 지루하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딴다. 하루에 한 사람이 두 가마 정도 따면 많이 딴다.

고추 따는 일이 끝나자 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수확한 고추가 꽤 되었다. 오달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수확한 고추가 꽤 되었다. 오달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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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열 자루예요. 가마니로는 몇 가마나 될까요?"
"한 네 가마? 지난번 두물 딸 때보다 많이 딴 것 같지?"

이런 경우를 오달지다고 해야 하나? 수확의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마음은 넉넉해지는 것은 왜일까?

잘 아는 집 건조장에 고추를 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여보, 빨간 고추 따고나니 마음까지 붉어진 거 같지? 그나저나 당신 코감기나 후딱 떨어지면 좋겠다!"

잘 아는 분의 건조장에 고추를 널었다.
 잘 아는 분의 건조장에 고추를 널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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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붉은 고추, #고추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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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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