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징[龍井] 기행은 김약연 목사와 시인 윤동주의 자취가 서린 명동촌(明東村)과 시내에 산재한 룽징중학(龍井中學), 옛 간도 총영사관 건물, 용두레 우물 등을 둘러본 후, 시 외곽의 일송정(一松亭)에 올라 룽징 시내와 해란강(海蘭江)을 조망하는 동선이 무난합니다.
룽징은 적어도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한 나절 정도로는 다 둘러볼 수도, 또 걸음을 서둘러 대충 살펴서도 안 되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금은 옌벤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작은 도시일 뿐이지만,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치열하게 살다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또렷이 남은 곳입니다.
자동차로 옌지[延吉]에서 백두산을 향해 잘 닦인 4차선 도로를 따라 30분쯤 가면 드넓은 초록 들판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도시, 룽징을 만나게 됩니다. 시내 한복판의 고층 건물이라 봐야 고작 4~5층 정도이지만, 주변이 온통 막힘없는 들판이다보니 도시가 마치 높은 산처럼 느껴집니다.
시내를 비켜 외곽으로 벗어나니 우리의 여느 시골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정겨운 풍광이 펼쳐지고, 그 길가에 명동촌이 숨은 듯 너그럽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명동촌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는 명동교회가 소박한 모습으로 남았고, 그 바로 아래가 윤동주의 생가 터입니다. 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김약연 목사가 윤동주와 문익환, 강원룡 등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명동학교의 터가 옥수수밭이 되어 남았습니다.
이 고장 출신의 걸출한 독립운동가의 면면과 동쪽(東), 곧 어두운 현실에 처한 우리나라를 밝힌다(明)는 뜻으로 지어졌다는 마을 이름을 통해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혼이 서린 곳임을 알 수 있지만, 나무 사립문과 소담한 고샅길, 저 멀리 보이는 낮은 산들의 스카이라인을 방해하지 않는 나지막한 지붕 등을 통해서 외려 평온하고 목가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명동교회 안에는 일제강점기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벽에 걸린 낡은 액자에 담겨 있습니다. 동선 자체가 어수선해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데, 안내원의 설명이 모자란 부분을 채워줍니다. 표정과 말투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고, 당시 식민지 백성의 울분과 한을 차분하게 전해주는 안내원의 설명은 단연 압권입니다.
허우대만 멀쩡할 뿐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버려진' 윤동주 생가를 둘러본 후 명동학교터에 가자면 마을 고샅길을 걸어 지나가야 합니다. 중국어[漢語]와 우리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섞인 채 들리고, 언뜻 봐서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닮은 모습으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다문화 공동체 마을입니다.
나이 지긋한 몇몇 분들에게 명동학교터의 위치에 대해서 물어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 잘 알지 못하는 '중국 마을'일 뿐이지만, 마을 안 우리나라의 한 시민단체에서 후원하는 '풍물 교실'에서는 모두가 흥겨운 장단에 어깨춤을 출 줄 아는 '우리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을 처음으로 일군 김약연 목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시내로 들어와 명동학교의 후신인 은진중학(恩眞中學)과 대성중학(大成中學) 등 간도로 이주해 온 선조들의 배움터 자리인 룽징중학을 찾습니다. 말끔한 운동장과 새로 지은 듯한 콘크리트 도서관 건물 등을 보노라면 여느 학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중학교와의 자매결연을 경축하는 현수막 등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교문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윤동주의 시비와 함께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옛 교사(校舍)가 보이는데, 여기가 룽징중학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역사 공간'입니다. 애써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2층은 역사관이며, 동선 상 관람 후 들르게 되는 1층은 기념품 가게입니다.
어쨌든 이곳은 20세기 초 항일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서시'를 새겨놓은 윤동주의 시비 앞에 서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에 얹혀진 젊은 그들의 신념과 의지를 떠올려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이 깨뜨리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토록 갈구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 뜨거운 피로 진정 우리 민족을 사랑했을까. 그들에게 민족은 목숨과도 바꿀 만큼 가치 있는 존재였으며, 목이 메어 불러도 가슴 벅찬 고마운 이름이었을까.
아니, 그들은 어쩌면 철저한 자유주의자였을지도 모릅니다. 문학과 종교(기독교)라는 도구로써 자유 의지와 해방적 사고를 체득했을 그들이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식민지 백성들을 짓누르는 억압과 굴종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었던 그들에게 일제는 부자연과 비정상의 극치였을 겁니다.
'서시' 구절을 다시금 되새겨보면서 옛 간도 총영사관 건물을 향합니다. 한 눈에 봐도 일본풍인 건물의 외양도 독특하지만, 지금도 관공서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 지하에는 간도 일대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와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갖춰져 있어 눈길을 끕니다.
간도 총영사관은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에 따라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를 대신해 설치된 기구입니다. 만주를 거쳐 대륙 침략을 엿보던 일제의 전진 기지이자, 이 지역에 사는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위한 감시 기관이기도 했습니다.
건물 뒤편 녹슨 철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니 불쾌한 곰팡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입구에 방명록은 놓여 있으되,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탓인지 종이 위 검은 잉크자국마저 색이 바랬고, 전시 시설 또한 많이 낡았습니다.
낡고 초라한 전시물을 통해 치열했던 과거의 독립운동이 현재적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관행처럼 박제화되고,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져 이내 버려질 것 같은 지하 감옥 같은 전시관을 나오며, 이곳에 생명력을 어떻게 불어넣을 것인가가 시급히 고민되어야 할 듯 싶었습니다.
일송정을 향하며 룽징의 랜드마크인 '용두레 우물'을 지나갑니다. 도시 이름이 이 우물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이 언저리에서 도시가 처음 시작된 셈입니다. 우물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을 찍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정겹습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도시의 유래가 역사가 되어 남았고, 그 현장도 이렇듯 잘 보존돼 있으니 그렇습니다. '뿌리'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룽징 사람들은 이곳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며 지금껏 아끼고 사랑하며 가꾸었을 겁니다.
시내를 살짝 벗어나 거친 비포장길을 타고 비암산(琵岩山)을 돌고 돌아 오르니 막다른 곳 벼랑 끝에 새뜻한 정자 하나가 서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옛 일송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짝퉁'입니다. 본디 일송정은 이 자리에 정자 모양을 한 채 우뚝 선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를 일컫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일정송(一亭松)'이라 해야 올바른 표현입니다.
어쩌다가 소나무 한 그루가 정자마냥 덩그러니 이곳에 남게 되었을까. 어떤 것이든 유적이나 유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이 자리한 곳과 주변 경관과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일송정은 그 대표격이라 할 만합니다.
광대무변. 이곳에서 내려다본 전망은 거침없이 후련합니다. 여기에 서면 그 누구라도 드넓은 벌판을 품어 안으며 '말 달리는 선구자'의 호연지기를 길렀을 법합니다. 물론, 친일 작가로 잘 알려진 윤해영이 1933년 '용정의 노래(선구자의 원제)'를 발표할 당시 이곳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관할이었습니다.
많은 친일시를 남긴 작가의 행적은 그만두고라도, 이때가 일제 헌병들의 혹독한 탄압으로 이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기운이 꺾인 시련의 시기였으니, 그가 어떤 장면을 보고, 또 어떤 의도로 이 시를 썼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항일독립운동가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지고, 또 널리 애창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노라면, 시로 된 노랫말조차 어떻게 왜곡된 채 해석되고 주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기만 합니다.
벤치가 놓인 정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온 개신교 선교 단체의 행사가 한창입니다. 기타 반주에 실린 찬송가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찬송이 끝나니, 이곳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셨음을 증거 하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인솔자의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시간 내내 정자 바깥에 데면데면하게 서서 야외 예배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곳이 길러낸 독립운동가 모두가 개신교 신자였다며, 그들의 독실한 신앙심을 본받아 이곳을 선교 1번지로 삼겠다고 합니다.
예배를 지켜보면서 종교와 민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자꾸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서시'를 되새기고, 문익환 목사와 강원룡 목사의 치열한 삶을 떠올리면서, 지금 일송정에서 예배 중인 '그들'과 과거의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겹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 정자에 기대 발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너른 들판을 촉촉이 적시며 흐르는 해란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반대쪽으로는 룽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푸른 들판과 가없는 지평선에 시선이 멈추니, 순간 이곳에 남겨진 우리 선조들의 치열한 역사와 삶을 망각할 뻔했습니다.
어떻든 룽징에서의 한나절은 보는 것보다 느낄 게 더 많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일송정에서 심호흡 한 번 한 후, 비암산을 뱀처럼 휘감은 도로를 다시 내려와 백두산을 향합니다. 두만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든 여정이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가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에 참가한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