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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한 신문이다.”

창간호를 보여 주며 평가를 부탁하면 이 얘기부터 들렸다. 김빠지고 맥 빠지는 이야기지만 동시에 고마운 이야기다. 나 또한 신문을 받자마자 그런 생각에 들었다. 의례적인 칭찬만 했으면 아마 서운 했을 것이다.  줄 간 행 간 사이가 좁아서 지루한 느낌이 있고 활자가 작아서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읽기가 힘들다는 지적이었다.

<월간 안양뉴스> 가 세상에 나오기 전날인 지난 9월7일에는 긴장감과 궁금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얼큰하게 술을 한잔 했는데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혹시 오자가 한 줄 건너 하나씩 있는 것은 아닌지! 제목이 뒤바뀌어 버린 엄청난 실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자꾸 튀어 나왔다.

어떻게 생긴 녀석이 나올까? 라는 기대감은 첫째와 둘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의 궁금증과 비슷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이미 윤곽을 확인한 터였지만 그래도 완전한 모습을 갖춘 <월간 안양뉴스> 모습이 자못 궁금했다.

“형제님 나왔습니다. 밤새 잘 주무셨어요? 저는 잠이 안와서 혼났습니다.”

8일 오전 8시30분경, 강찬희 실장(인쇄업체 ‘학림사’) 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와 나는 천주교 신자이기에 형제라는 호칭을 쓴다. 그도 나처럼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거두절미 하게  “지금 갈 게요” 라고 대답 한 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학림사로 향했다. 집과 학림사 까지는 약 3km 정도.

신문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반가움 이었다. 온라인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던 상대와 바깥세상에서 만나 악수 하는 기분 이었다. 우리의 땀과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생각 하니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월간 안양뉴스> 창간호.
 <월간 안양뉴스> 창간호.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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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안양뉴스> 는 3명의 무모함(?)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디자인을 전공한 이철우씨는 나와 같은 마을에 산다는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인쇄업체 '학림사'를 운영하는 강찬희씨는 글쓰기  좋아한다는 것이 인연이 되어 종이 신문 발간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리 많은 돈이 들지는 않겠는데요."

이 말을 듣고 종이 신문 만들 계획에 돌입했다. 인쇄전문가 강찬희씨가 계산기를 몇 번 두드린 후 이렇게 말했다. 지역신문 창간 할 때, 후원회를 모집하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수익 사업을 해서라도 자금을 끌어 모은 다음 시작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우린 그런 과정 생략하고 일단 한번 해보자는 정신으로 발간 작업에 돌입했다.

후원회 모금 통장은 몇 달 전에 개설해 놓았다. 그렇지만 <월간 안양뉴스> 발간 계획을 세울 당시 통장 잔고는 거의 바닥이었다. 모금 하기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다보니 모금이 이루어 질 리 만무했다.  시간도 없었다. 후원 인을 모집하려면 시간을 내서 후원금 내줄 만한 인사들을 만나야 하는데 내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월간 안양뉴스> 탄생 전날 가슴이 두근두근

"신문에 미치면 할 수 있다" 는 <수원시민신문> 김삼석 대표의 한 마디에 힘을 얻어 1년 전인 2006년 8월경부터 인터넷 <안양뉴스>를 시작했다. <안양뉴스> 첫 기사는 2006년 8월22일에 올린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한 통일 노래자랑'이란 제목의 문화 관련 기사다. 그 후 지금(2007년9월22일)까지 797꼭지의 기사를 올렸다.

처음 6개월간은 독자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개인 홈페이지처럼 운영됐다. 대부분의 기사를 혼자 쓰다 보니 내용도 빈약했고  혼자만의 생각만 묻어나기에 고독하고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 <안양뉴스>가 고독한 신문에서 한발 벗어난 것은 전교조(전국 교직원 노조) 안양지회장 장윤호 선생 글이 올라오면서 부터다.

지난 2007년 3월16일, 장 선생은 '학운위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안양뉴스>에 투고했다. 교육현장에서 바라본 학운위(학교운영위원회) 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현직 교사가 작성했다는 것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4월 16일에는 '치맛바람도 차별도 없는 학교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기사가 <안양뉴스> 에 올라왔다. 갓 학교운영위원장이 된 학부모의 담담한 심정과 각오가 담긴 글이었다. 이 기사를 쓴 것은 바로 나다. 학부모 입장에서 바라본 학교운영위원회(이하 학운위)에 대한 소회를 군더더기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 하려고 애썼다.

<안양뉴스> 에 실린 '학운위' 관련 기사는 방송과 인연을 맺게 해 주었다. 안양방송 권보형 작가 눈에 띄어 장 선생과 난 5월 4일 'ABC포커스'라는 프로그램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학운위 관련 기사와 방송이 나간 후 격려와 애정 어린  관심을 표현 하는 분들이 대다수 였다. 

반면, 항의성 전화를 한 사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운영위원을 해 본경험이 있는 학부모였다. 기사와 토론회에서 밝힌 것은 학운위 에서 학부모가 차지하는 역할 과 비중 그리고 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다. 어째서 학부모가 내 말이 틀렸다고 항의 전화를 한 것인지.

자전거 사업을 하는 자동차 전문가 이용덕씨.
 자전거 사업을 하는 자동차 전문가 이용덕씨.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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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관련 기사가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다. 자전거 기사를 쓰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는 현재 자전거 사업을 하고 있는 자동차 전문가 이용덕(44)씨다. '자동차 보다 자전거가 진보적 교통수단'이라는 그의 주장에 이끌려 2007년 4월 5일 '자동차 보다 자전거가 진보 교통문화'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 자전거 관련기사는 지금까지 12회째 연재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기획연재로 다룰 계획이다.

자전거 관련 연재를 시작하면서 자전거를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했다. 자전거를 타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자전거 기사를 쓰기 위해서다. 자전거를 타고 시청 경찰서 집회현장 등 여러 곳을 취재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자전거 타는 기자'라는 별명을 기대했다. 쉽지 않았다. 주변 사람에게 암시를 주고 스스로 자전거 타고 다니며 취재하는 기자라 떠들고 다녔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결국 그 이후 ‘자전거 타는 기자’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스스로 광고 하고 다니게 되었다. 

광고 효과가 있었다. <월간 안양뉴스> 1면에 '오토바이타는 수원기자가 자전거 타는 안양기자' 에게 라는 부제가 붙었다. "신문에 미치면 할 수 있다"며 힘을 주었던 <수원 시민신문> 김삼석 기자가 내 마음을 알아 준 것이다.

김 기자는 창간 축사에서 "오토바이보다 더욱 진보된 '행복과 낭만을 전하는 자전거'를 타고 안양을 누비는 <안양뉴스> 기자를 존경한다"는 찬사를 보냈다. 김 기자는 3년 동안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수원 지역을 누비며 취재 하고 있다.

'자전거 타는 기자' 라는 별명을 얻고 싶어서

'일만하던 사십대 가장의 태국 여행기' 에 실린 사진(강찬희 씨 가족).
 '일만하던 사십대 가장의 태국 여행기' 에 실린 사진(강찬희 씨 가족).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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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뉴스> 죠? 학림사 강찬희 라고 합니다. 기사 보고 전화 드렸어요."
"아! 네! 기사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찬희씨와 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름이 시작되던 2007년 5월경이다. 독자가 내 기사를 읽고 누군지 궁금하다며 직접 전화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며 칠 후 그와 점심 식사를 하며 <안양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제안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내 제안을 받아 들였다. 

강찬희 시민기자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진솔한 삶이 묻어있다. '여자 몸으로 찔통까지 지셨던 어머니'라는 기사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태국을 여행 하고 나서 작성한 ‘일만하던 사십대 가장의 태국 여행기’ 는 일주일 간격으로 6회 연재 되었는데 지금도 독자들이 가장 즐겨 읽는 연재물이다.

강찬희 시민기자는 <안양뉴스>의 오프라인 판 <월간 안양뉴스>가 태어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줬다. 우선, 넓은 인맥을 기반으로 종이 신문 발간하는데 필요한 자금 문제를 광고로 해결했다. <월간 안양뉴스> 에 실린 모든 광고는 그가 따온 것이다. 막연하고 어렵게만 생각되던 종이신문발간을 실현 가능한 일로 만들어 준 것은 인쇄업계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그의 전문성 때문이다. 그는 종이 신문 발간 기획단계부터 윤곽을 그려주고 체계를 세워 주었다.

창간의 주역 이철우(좌) 강찬희(우).
 창간의 주역 이철우(좌) 강찬희(우).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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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뉴스> 창간호 발간 일자는 9월 10일이고 배포 시작일은 11일이었다. 편집과 인쇄를 거쳐 제본까지 끝냈지만 2장 8면으로 이루어진 신문이 1장씩 분리되어 접혀 있었다. 접힌 신문을  펴서 분리된 각 장을 합치고 다시 접어서 정리하는 공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본소에 맡겨도 될 일이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자금 대책 없이 벌린 터이기에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무었이든 해야 할 판이었다. <월간 안양뉴스> 창간 주역 3인(이철우, 강찬희, 이민선)은 9일, 10일 이틀 동안 밤9시부터 새벽3시 까지 주인 없는 제본소에서 일을 했다. 사심 없이 일을 도와 준 분이 있다. 천주교 신자인 강찬희 씨 종교적 '대부' 이재현씨는 이틀 동안 아무조건 없이 일을 도와주었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내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연휴가 끝나면 다시 <월간 안양뉴스> 제작에 돌입해야 할 것이다. 창간축사를 써 준 한 선배는 "너는 이제 포기 할 수도 돌아 갈수도 없다"는 말을 했다. 종이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순간 독자들과 이미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기에 싫든 좋든 매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10월10일에 <월간 안양뉴스> 두 번째 신문 '10월호'가 나온다. 글자도 크고 줄 간 행 간 도 넓은 '친절하고 읽기 쉬운 신문'을 만들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월간 안양뉴스>, #<안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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