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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의 추석 이야기
 솔이의 추석 이야기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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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 있죠?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Holiday)이 있어요. '추석' 또는 '한가위'라고 하지요. 한 번 따라 해 볼까요? 추석!"

"추.석!"

"…그럼 추석에는 뭘 먹을까요?"

"터키(turkey, 칠면조)요~~"

어제 한글학교 수업 중 한 장면이다(기자는 미국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온 아이들한테야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는 것쯤이야 이미 상식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추석은커녕 한국에 대한 기억조차 전무하니 '추석과 칠면조' 이상할 것 없는 조합인 셈이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읽고 우리의 추석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이네 가족이 사는 곳은 적어도 3층짜리 건물이 늘어 서 있는 '도시'다. 두 밤만 자면 추석이라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바쁘다. 목욕탕, 미용실, 이발소, 세탁소, 치과, 약국, '슈퍼' 등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고향 내려갈 준비가 한창이다. 추석 전날 이른 아침, 아직 문 연 가게 하나 없는 이른 새벽, 솔이네 식구들은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고향 가는 길 풍경
 고향 가는 길 풍경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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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찍 서둘렀는데도 버스 터미널엔 사람들이 가득하고, 도로에 올라선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다. 막히는 도로에 차를 세운 채로 컵라면을 사 먹는 이도 있고, 어깨 운동, 목 운동 하며 지루한 몸을 푸는 이도 있고, 자동차 사이사이로 오징어를 팔며 다니는 이도 있다. 그 와중에 내려 자동차 먼지를 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운전석에 누워 입 벌린 채 잠을 자는 이도 있다. 아이 우유 먹이는 엄마도 있고, 오줌을 뉘는 엄마도 있다.

추석 전날 시골집 풍경
 추석 전날 시골집 풍경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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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시골 마을 입구에선 당산나무가 반갑게 인사하고, 고무신 신은 할머니는 넘어질 듯 반갑게 뛰어 나오신다. 일가 친척 모두 모여 북적대는 시골집 풍경도 정겹다. 큰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는 둘러앉아 전을 부치고 있고, 제기를 꺼내 닦고 계시는 할머니, 넣어 두었던 병풍을 꺼내 손질하고 있는 삼촌, 밤 까는 작은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바둑 두시는 할아버지,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도 있다.

밤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둥근 달 올려다 보며 소원도 빌고, 송편도 빚는다. 추석 날 아침엔, 차례를 지낸 후 성묘도 가고, 내려오는 길엔 마을 농악대 장단에 맞춰 춤도 추며 놀이판이 크게 벌어지기도 한다.

다니러 온 자식들 떠나보내는 날 새벽, 홀로 앉아 불 밝히고 앉아 있는 어머니,할머니의 모습이 가슴 찡하다.
 다니러 온 자식들 떠나보내는 날 새벽, 홀로 앉아 불 밝히고 앉아 있는 어머니,할머니의 모습이 가슴 찡하다.
ⓒ 이억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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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네가 떠나는 날 아침, 아직 모두들 잠든 새벽인데 할머니는 부엌에서 홀로 불 밝힌 채 쭈그리고 앉아 계신다. 햇곡식과 과일, 옥수수, 호박에 참기름, 들기름까지 바리바리 싸 보낼 생각에 마음이 분주한 할머니.

마침내 갔던 길 다시 거슬러 집으로 돌아오니 한밤중. 며칠 쌓인 피로로 온몸은 축 처졌지만 마음만은 풍성하다. 시골집에서 가져온 건, 바리바리 싸 주신 먹거리 보따리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풍성한 정과 사랑과 추억인 까닭이다.

잘 돌아왔노라 인사 드리는 전화로 추석은 마무리되는 셈이다.
 잘 돌아왔노라 인사 드리는 전화로 추석은 마무리되는 셈이다.
ⓒ 이억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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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시골 내려가는 새벽, 아래 그림은 돌아오는 밤 풍경
 위 그림은 시골 내려가는 새벽, 아래 그림은 돌아오는 밤 풍경
ⓒ 이억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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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장면들이 요즘의 추석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한국인의 체형도 많이 변해 요즘엔 7등신 8등신도 많다는데 솔이네 가족이며 친척,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짧고 통통하기만 하다. 고향집 간다고 한껏 멋을 낸 차림새도 촌스럽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추석 아침 차례상 앞에서 남자들만 절을 하는 풍경은 요즘 아이들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귀성길 교통 체증 때문에 '역귀성'을 택하거나, 차례는 미리 편리한 날짜에 지내고 추석 연휴가 시작하는 날은 인천공항으로 날아가는 이들이 많아졌다는데 시골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가 웬 말인가 싶기도 하다.

출간된 지 10여 년이 지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자면 작가가 기억창고 속 소중한 장면들을 끄집어 내 얼마나 따뜻하게 다듬고 늘어 놓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인물들과 풍경의 정겨운 모습은, 거기까지 독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으면 정말 서운해 하기라도 할 듯 구석구석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정작 이야기를 이어가는 '글'은 한두 줄이거나 그나마 아예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한 장 한 장 넘겨가는 속도는 행이 많은 그 어떤 책보다 느리기만 하다. 그림을 보며 엄마와 아빠의 혹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추석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결국 이 그림책의 '이야기'인 셈이다.

자고 일어나 눈뜨면 달라지는 세상, 나만 두고 달려갈까 싶어 그 끄트머리 잡고 헉헉거리며 끌려가고 있는 내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세련되고 풍요롭고 똘똘해져 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딱히 뭐 나아졌나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처음엔 그림책 속 볼품없어 뵈는 우리네 부모님과 이웃의 모습이 촌스럽고 우습게 보이더니 문득 지금 내 모습이 더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할 것이 그리 많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에 아이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문득 스치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고단한 일상에 이래저래 명절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것일지 몰라도, 그닥 거창하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에 정작 소중하게 보듬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이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시원스레 달도 둥글고 훤한 추석 즈음에.

덧붙이는 글 | * 솔이의 추석 이야기 / 이억배 글.그림 / 길벗 어린이 / 1995



솔이의 추석 이야기

이억배 지음, 길벗어린이(1995)


태그:#추석,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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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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