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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다 야스오 새 일본 총리.
후쿠다 야스오 새 일본 총리. ⓒ 후쿠다 야스오 홈페이지

2002년 10월 15일, 북한에 납치됐던 일본인 5인이 20여년 만에 일본 땅을 밟았다. 지무라 부부(야스시-후키에), 하스이케 부부(가오루-유키코), 그리고 소가 히토미. 한달 전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정한 일본인 피랍자 13명 가운데 생존자들이다.

이들은 당초 '일시 귀국'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5명이 돌아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이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본인들이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고 했다. 이에 북한이 '약속 위반'이라고 항의하면서 양국 관계는 경색의 길로 들어섰다.

'납치문제'에 대한 이런 경직된 대응은 25일 정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아베 신조 당시 관방 부장관이 주도했다. 아베는 "(5인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라고 잡아뗐다. "납치된 국민이 20여년 만에 겨우 돌아왔는데 이들을 다시 납치한 국가에 돌려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후쿠다 야스오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약속은 일단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교섭이 가능하다는 것. 당시에는 강경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납치문제'에서 보기 드물게 이성적인 목소리를 낸 정치인이었다.

외교적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경직된 대북정책

돌이켜보면 이 일은 그 이후 북일관계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북일관계는 지난 5년간 상호 불신과 경멸, 일방적 압력과 이에 대한 반발로 점철돼왔다. 일본 정부는 그렇게 '납치문제'에 매달렸지만, 의혹제기만 무성했을 뿐 추가로 확인된 사실은 아직까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점점 일본정부의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6자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계획 이행에 따른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계획이 마련됐지만, 일본은 "납치문제에 진전이 없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6자회담 프로세스에서 스스로를 소외시켜 갔다.

이와 동시에 그토록 공고하게 보였던 미-일 동맹에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의회에서 '옛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은 아베 정권에게 역사문제로 한국·중국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다양한 신호를 보냈다.

만약 2002년 후쿠다의 주장대로 일시 귀국한 5인을 일단 돌려보내고, 북한과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를 가정법으로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아베 정권에서 후쿠다 정권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룬 지금은 예외다. 향후 대북정책의 변화 방향을 예측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2002년 대북 비밀교섭 실질적 지휘

후쿠다는 당시 관방장관은 납치문제를 '북-일 관계정상화'란 큰 틀에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채택된 '북-일 평양선언'의 정신이기도 하다.

사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일본인 납치를 시인,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상태에서 북한이 다시 피랍자들의 신병을 놓고 거래를 시도할 것이란 판단은 비현실적 집착이었다. 이는 북한이 약 1년 반 뒤 피랍자 가족들을 아무 조건 없이 일본으로 돌려보낸 사실로도 거듭 입증된다.

후쿠다는 '북-일 평양선언'을 만들어내기까지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진행했던 북한과의 비밀교섭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다나카 국장은 지금까지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북한측 실세 '미스터X'와 1년여에 걸친 접촉을 통해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방북을 이끌어냈다. 그는 이 과정을 고이즈미 총리와 후쿠다 관방장관, 두 사람과만 공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쿠다는 당시 외무성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다나카 마키코 외상을 제치고 주요 외교과제들을 직접 챙겼다. '북-일 평양선언'도 그와 다나카 국장의 손에서 다듬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일 평양선언'의 정신은 한마디로 '북-일 관계정상화'란 큰 목표를 정해놓고, 과거청산과 납치·핵·미사일 문제 등 양국간 제반 현안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방북 이후의 상황은 그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납치문제가 몰고 온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다른 모든 과제가 납치문제 해결 뒤로 미뤄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27일 6자회담이 첫 시혐대

후쿠다는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를 위한 각종 토론회와 연설회에서 대북정책을 놓고 아베 정권과는 확실히 다른 접근법을 보여줬다.

그는 "지금은 교섭의 여지가 없는 듯한 매우 경직된 정세"라며 "교섭하려는 자세와 의욕이 북한에 전달될 방법이 없겠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해 '적극적 협상'을 강조했다. 또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춰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며 최근 미국정부의 대북정책 변화 조짐에 따른 노선수정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한 일본 언론인은 "후쿠다 총리는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스스로 깊숙이 관여해서 만든 문서이고, 이후에도 이 문서의 이행에 애착을 보여왔다는 점을 들었다.

평양선언은 "북-일 정상은 양국 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을 해결해 실질적인 정치·경제·문화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양국의 기본 이익과 일치하고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로 시작한다.

다나카 전 국장은 최근 한 강연회에서 "북-일 평양선언은 포괄적 해결방안”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북한과의 협상은 '포괄적 접근방식'을 취해야 해결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되는 6자회담은 이런 '후쿠다 대북노선'의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물론 지난 5년간 일본의 대북정책이 워낙 경직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여론이 한쪽으로 쏠려있기 때문에 이를 급속하게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후쿠다 총리 자신이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여 앞으로의 변화가 주목된다.


#후쿠다#6자회담#북-일 평양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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