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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습니다. 동화책이나 동시집은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보는 책 같아서 가까이하지 않을 테지요. 소설이나 시는 아직 어려울 테니 읽기 힘들고요. 문학이 아닌 책은 중학교 다닐 만한 나이인 아이들 눈높이에 너무 높거나 낮아서 알맞지 않기 일쑤입니다. 예술이나 문화나 사회나 과학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말 그대로 사이에 낀, 가운데에 찡겨 버린 어중간한 나이처럼 되고 마는 아이들, 열넷부터 열여섯입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한테는 소년소설도 즐기도록 하고 동시도 즐기도록 해 주어야 알맞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즐길 수 있는 문학'이건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 참 드뭅니다. 어쨌든, 동시도 그저 어린아이들만 읽는 문학이 아니라 낮은학년이 즐기는 동시와 높은학년과 열대여섯 아이들까지 두루 즐길 수 있는 문학이 따로 나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이나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책과 마찬가지로 '학교로 치면' 중학교, 나이로 치면 열넷부터 열여섯 사이에 있을 아이들도 문학작품으로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맛볼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을 펴내야 좋습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어느 만큼 전문성을 담아내는 책도 차근차근 맛볼 수 있도록 해 주면 더욱 좋고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을 좀더 어렵게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고등학교 때 배울 지식을 조금 쉽게 풀어서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이때 아이들이 즐기고 반가이 맞이할 책을 출판사나 책방이나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기꺼이 알뜰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초등학생도 사람이고 중학생도 사람이며 고등학생도 사람입니다.

 

어린이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한편, 청소년도서관이 있어야 하고, 학문을 깊이 파고들 사람이 즐겨찾을 전문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가운데, 늘 바쁘고 고된 일에 매여 있는 월급쟁이들이 마음 쉬며 찾아갈 쉼터 같은 도서관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도서관을 마련하자면,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즐길 책, 고등학생이 즐길 책, 여느 월급쟁이가 즐길 책을 차근차근 엮어낼 만한 문화와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어린이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제 또래보다 적잖이 앞서가는 책읽기를 하는 아이들, 그래서 열대여섯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기는 열두어 살짜리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또래들보다 조금 눈높이가 낮은 열서너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길 수 있겠지요. 그래, 나이나 학년으로 치면 세 해이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래로 두 해, 위로 두 해 해서 모두 일곱 해를 아우를 수 있는 눈길과 눈높이를 살피는 책을 도서관에서 갖추어야지 싶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저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중학교 다니는 딸아들 둔 어버이라면 으레 느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들도 몸소 느끼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머리'로는 알고 '입'으로는 말씀을 하시지만 실천을 못하는구나 싶어요. 몸으로는 못 옮기지 싶어요. 출판사에서 땀흘리고 힘들여서 중학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책을 펴낸다고 해도, 잘 안 팔릴 뿐더러,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고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이 눈여겨보아 주지 않으니 버겁다고도 합니다. 더구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모든 '교양 책'을 버리고 참고서와 문제집만 달달달 외우도록 끄달리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 대학교 입시가 걸립니다. 중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아이들은 입시에 억눌려서 책을 못 읽습니다. 책 읽을 틈이 없습니다. 교과서와 시험에 짓눌려서 마음이 답답하지요. 게다가 머리도 아파요. 아무리 좋은 책을 쥐어 준다 해도 그 책을 읽고 싶을까요? 아니, 읽을 겨를이 있을까요. 읽을 겨를을 내어주는 학교 교사가 있나요? 읽도록 마음써 주는 학부모가 있나요? 더구나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시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학생 스스로 그 책을 아주 좋아해하지 않는다면 한두 권 읽다가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스스로도 그렇지만, 학생들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교사들이 이끌지도 않거나 못하곤 합니다. 교사들로서도 학생들이 시험점수 많이 내는 쪽을 더 좋아하잖아요. 학생들이 자기한테 좋은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도록 이끌자면, 교사들은 '교과서 진도 넘어가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마음이고 품이고 시간이고 돈이고 많이 들여야 합니다. 이런 데에 마음쓴다고 학교에서 돈이 나오지도 않고 사회에서 알아주지도 않겠지요. 더군다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밤 열 시나 열한 시까지 붙들어 매는 '거짓 자율학습'을 시켜야 하니, 몸이 지쳐서 제대로 된 배움을 나누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이기 어렵구나 싶어요.

 

그래서 중학교 아이들이 좋은 책을 가까이하도록 하자면 무엇보다도 입시제도가 사라져야 합니다. 틀에 박힌 교과서 굴레도 가벼워져야 하며, 아이들한테 지나친 공부 짐을 주지 말아야 해요.

 

아이들이 모두 회사원이 되어야 할까요. 큰회사에 들어가 연봉 1억씩 받는 월급쟁이가 되어야 할까요. 모두 영어를 잘해서 세계시민이 되어야 하는가요. 아이들 앞날은 영업사원뿐인가요. 아이들은 인터넷 다루는 일만 해야 하는지요. 아이들이 할 일은 '돈 많이 버는 일', '일등이나 일류가 되는 일', '이름을 날리는 일', '권력을 붙잡는 일'뿐인가요.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입니다. 저마다 다른 것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아이들 가운데 연예인이나 가수도 나와야겠지만 농사꾼과 노동자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교사도 나와야겠지만 청소부와 운전기사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공무원도 나와야겠지만 장사꾼이나 광부도 나와야지요. 고기잡이도,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책을 엮어내는 사람도 나와야 해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아이도 나와야 합니다.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나와야 합니다.

 

같은 노동자 가운데에도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 쇠붙이를 다루는 노동자, 종이를 다루는 노동자,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 용접을 다루는 노동자, 페인트바르기를 다루는 노동자 …… 들도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어른이라면, 이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가며 일하고 어울릴 아이들임을 생각해서 아이들마다 '자기 됨됨이와 생각과 마음'을 알뜰하고 푸짐하고 너르게 가꾸고 추스르는 일을 학교와 집과 동네에서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좋습니다. 책은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자기 모습과 마음을 가꾸는 길잡이 가운데 하나로 곁에 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건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나라 중학교 아이들한테는 책도 없지만 삶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현실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동무도 없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이것저것 많이 있는 것 같지요? 컴퓨터도 있고 손전화도 있고 이것저것 많이 가진 것 같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껍데기뿐이에요.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어요.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가 버리고 마는 껍데기 말입니다.

 

아이들한테는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알맹이를, 튼튼한 기둥을 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 스스로 이런 속살과 알맹이와 기둥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이끌고 살뜰하게 살아가도록 삶터만 마련해 주면 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기 삶을 마음껏 펼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책은 책대로 즐기고 다른 것은 또 다른 것대로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뚫린 것 없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꾸려가기 어려운 세상이고 현실인 이 나라인 터라, 아이들한테 주어진 것은 거의 없고 아이들 스스로 즐길 만한 것도 참으로 드물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책을 건네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런 제 마음은 아이들이 '책만 보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책도 보고 다른 것도 즐기면서' 자기 삶을 아이들 마음대로 신나고 즐겁게 찾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아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신나게 뛰어놀고 마음도 씩씩하게 가꿀 중학교 아이들, 열대여섯 살 이팔청춘 아이들 얼굴에 그늘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싱그러운 꽃잎이 달릴, 고운 몽우리로 피어날 꽃다운 아이들한테 어른인 우리들이 무엇을 주고 있고 무엇을 숨기거나 없애고 있는지 살피며, 또렷이, 아주 똑똑히, 빈틈없이 샅샅이 살피면서 알아차리고 다독이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아이들한테 책다운 책을 내어주고, 삶다운 삶을 꾸릴 수 있는 틈을 주면서.


태그:#책읽기,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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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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