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태를 놓고 중국과 미국·유럽연합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26일 유엔 안보리에 미얀마 제재 검토를 요청한 데 대해, 중국측은 미얀마 사태를 국내문제로 규정하면서 제재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미얀마 사태에 개입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미얀마 국민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중국이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을 반대하는 것도 단순히 미얀마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과 미국·유럽연합이 미얀마 사태를 놓고 대척을 벌이는 데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서방세력의 미얀마 진출이 결국에는 중국 진출으로 이어졌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서방의 미얀마 공세는 중국 정복 위한 '울타리 쳐내기' 전략두 차례의 아편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완전 정복하는 데 실패한 영국·프랑스 등 서양열강은 대체로 1860년대부터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중국 주변부에 있는 지역들을 먼저 공략한 다음에 중국을 정복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양열강은 청나라와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그 주변 지역에 대해서는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서세동점(서양 열강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려는 경향) 이전에 동아시아에서는 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 등의 지역이 패권국 청나라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청나라 지방정권으로 편입된 대만을 뺀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는 번속국들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볼 때에, 이 번속국들은 서양열강의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과 서양 열강이 통일적인 전략을 수립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주변지역을 향한 각개약진을 통해 전체적으로는 중국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얀마에 대해서는 영국이, 베트남에 대해서는 프랑스가, 대만·오키나와·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이 공세를 강화했다.
미얀마의 경우 1824년 및 1852년에도 영국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지만, 1860년대 이후로 한층 강화된 영국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얀마는 어떻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나미얀마가 1885년에 어떻게 멸망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국의 침탈과 압박이 가중되자, 미얀마 최후의 왕인 띠보는 조선 고종의 전략과 유사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프랑스를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885년 1월부터 미얀마-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이 가시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은 띠보 왕에게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미얀마 왕실이 있는 만달레이에 영국측 대리인을 두고 영국군 1천명이 상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영국측은 띠보 왕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절당하면 이를 빌미로 군사공격을 단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띠보 왕이 1885년 11월 4일에 영국측의 통첩을 수락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영국측 요구를 수용할 테니 왕권은 유지하게 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영국군은 띠보 왕의 수락을 거절하고 11월 17일 전쟁을 개시했다. 그리고 11일만인 1885년 11월 28일에 띠보 왕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미얀마를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1879년에 오키나와가 이토우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일본에게 점령된 지 6년 만에 중국의 또다른 울타리가 제거된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가 멸망된 1885년에 베트남도 프랑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중국의 안보체계가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대만이 10년 뒤인 1895년에 일본에 넘어갔고, 뒤이어 조선마저 1910년에 일본에 강점되고 말았다.
한국과 미얀마, 과거엔 공동운명체이처럼 주변의 울타리가 모두 해체된 뒤인 1912년에 청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와 중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중국 주변의 울타리인 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이 하나씩 멸망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의 힘이 약화되었고 최후까지 버틴 조선마저 멸망하자 청나라도 곧바로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은, 미얀마·조선 등과 중국 사이에 '순망치한' 관계가 성립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에는 한국과 미얀마가 별 관계가 없지만 과거에는 이처럼 두 나라가 안보상의 공동운명체였다는 점이다. 조선과 미얀마는 중국을 중심으로 공동운명의 한 배를 타고 있었다.
미얀마와 조선은 서양열강이 중국 침략의 전 단계로 주목한 대상이었으며, 결국 미얀마와 조선 등이 모두 멸망한 후에 청나라도 멸망하고 말았다. 두 나라의 역사적 인연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같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보면,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가 어떻게든 미얀마 사태에 개입하려 하고 중국은 어떻게든 미국 등의 개입을 막으려고 하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미얀마에 집착하는 것과 한국·대만·오키나와 등에 집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이유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대만·오키나와와 더불어 미얀마는 중국과 동아시아 제패의 전초기지인 것이다.
단순히 미얀마가 미얀마인 데에 그친다면 미국 등 서방세계가 그토록 미얀마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과 동아시아로 가는 길 중 하나이기 때문에 서방세계는 어떻게든 미얀마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