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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가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음력 8월 보름날이었던 9월 25일 오후, 명절이어서 집에만 있기도 심심하고 해서 순천 낙안의 낙안읍성 쪽에 가게 되었다. 가는 길은 귀경 행렬로 인해서인지 차들이 좀 밀리고 있었다. 고흥, 보성 쪽에서는 이쪽 길로 광주로 가는 차편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낙안읍성으로 가기 전에 잠시 낙안향교에 들렸다. 낙안읍성은 집과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자주 갔으나, 정작 낙안읍성과 가까운 낙안향교는 많이 가보지 못해서 모처럼의 기회를 낸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던 낙안향교

 

 

낙안향교의 홍살문(紅箭門)이 입구에서 반겨 주었다. 홍살문은 주로 향교나 관아, 서원 앞에 세워놓는다. 특히 향교에는 홍살문이 거의 있어서, 어디 가서 향교를 찾고자 하면 이게 매우 좋은 표식이 된다.

 

주로 충신, 열녀, 효자의 모범 행실을 본받자는 취지에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러한 것은 조선후기에 많이 세워지는데, 이는 나라가 어지러워질수록 유교적이며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무장하려는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이 낙안향교의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긴 하나, 근래에 와서 복원한 것이지, 예전부터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마비는 말 그대로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하마비가 있는 곳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며, 말에서 내려 최소한의 예의와 격식을 차린다는 의미가 있다.

 

 

이 낙안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된 것이다. 향교는 유학의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국가교육기관으로, 지방이 크든 작든 하나씩만 세워놓았다. 사립교육기관인 서원과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낙안향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효종 때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내부엔 학생들의 교육장소인 명륜당과 공자와 유교의 성현들을 모셔놓은 대성전 등이 있다.

 

그런데 이날따라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님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낙안향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일전에 부여향교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 그때도 문이 닫혀있었다. 향교 답사를 가면 이렇게 문이 닫혀있어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늘 개방해 두어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흔히 볼 수 있어 쉽게 지나친, 그러나 수많은 사연을 담은 비석들

 

아쉽지만 낙안향교의 정문인 경앙문(景仰門)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하였다. 그냥 낙안읍성으로 가려고 하다가, 문득 낙안향교 앞에 모여 있는 비석들이 보였다. 조선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의 비석들이 보였는데, 사실 다수는 외부에서 옮겨온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성곽 등의 입구에 이런 비석들을 두곤 하며. 진도 남도석성, 공주 공산성, 고창 고창읍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비석이다. 주로 비석들은 무덤 앞에 있는 게 많다지만, 관청 앞에 있는 비석들은 다수가 공덕비다. 이러한 공덕비 중에는 진심으로 고을을 편안하게 하고, 민생을 돌본 관리들을 기려서 만든 게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시대 승평부사였던 최석을 기린 팔마비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자신이 버젓이 고을을 다스리고 또한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덕비를 만들게 한다. 또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다고 할 수 있는 조병갑의 공덕비가 김해에 있기도 하다.

 

 

낙안향교 앞의 비석들이나 좀 볼까 해서 이런저런 비석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가운데 즈음에 한 비석을 보고 앉아계신 할아버지 한 분을 보게 되었다. 그분은 한 비석을 계속 쳐다보시면서 그 글씨를 읽어보시며 무엇인가 확인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슬쩍 그분 옆으로 다가갔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도 이 비석 중에서 조상님이 계시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이 비석 중에 조상님이 계시는가라니…. 없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분은 다시 비석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비석에 써있는 분이 내 7대조이시지. 족보를 보고 그 이름을 보고 찾아왔어. 이곳의 군수로 계셨던 분으로 이렇게 공덕비가 세워져 있구만. 허허.”

 

그분의 말씀을 듣고 비석을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분은 그 비석에 쓰인 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김정삼(金鼎三)이라고 하는 분으로서 족보에서 그 이름을 보고, 이렇게 찾아 왔는데 4년 만에 온 것이라고 하셨다. 67세이시며 안동 김씨라고 밝힌 그 할아버지께선 이번에 추석을 맞아 성묘하러 오셨다고 한다.

 

본디 보성 조성 사람으로서 지금은 광주에서 살고 계신다고 하는데, 아들과 함께 성묘를 하고 나서 다시 광주로 올라가는 길에 자신의 조상을 찾아 이곳에 들른 것이었다.

 

그분은 이어서 안동 김씨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사실 난 안동 김씨에 대해 자세히 몰르면서 한 가지 안경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교과서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꼭 말하는 것이 세도가문 아니던가? 세도 가문 중 대표적인 성씨가 조만영으로 대표되는 풍양 조씨와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아니던가? 조선 후기를 떵떵거리던 그 가문에 대해 세도정치를 행했다는 점에서 조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안동 김씨라고 하여 모두 같은 안동 김씨가 아니란다. 이 점은 처음 알았는데, 안동 김씨는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가 있다고 한다. 그분은 바로 구안동김씨로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였던 백범 김구선생과 같은 항렬이라고 하면서 허허허 웃음을 지으셨다.

 

이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는 같은 안동김씨여도 혈연이 관련이 없다고 하시면서 친척뻘 되는 다른 가문들도 언급하셨다. 아무래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였다.

 

7대조부의 비석을 찾아 이곳에 온 할아버지 이야기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그 할아버지께서 땅에 앉아 풀 한 포기를 쓰담으면서 말씀하셨다.

 

“이 풀을 봐봐. 단순한 풀 한 포기일는지 몰라도 뿌리가 있잖여. 그 뿌리가 있응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저기 향교 쪽의 큰 나무를 봐봐. 저게 저렇게 큰 모습을 갖추고 아직도 있는 것은 저 많은 줄기 때문이겠어? 아님 무성한 이파리 때문이겄어? 바로 뿌리 때문이재. 뿌리.”

 

그렇게 말씀하시곤 다시 비석을 바라보고 계셨다. 비석을 지긋이 바라본 후에 약간의 한숨을 쉬신 후 다시 말씀하셨다.

 

“근디 말여…. 요새 사람들은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들도 많더라고. 국사, 세계사 같은 것을 잘 알고,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명문대에서 석사, 박사를 딴 이들에게 물어봐봐. 당신 성씨가 뭐시오, 몇 대손이요? 여기까지는 잘 대답할는지 몰러. 근디 무슨 파요, 시조가 누구요, 중시조는 또 누구고, 항렬자는 어찌 되오? 조상 중에 유명하신 분이 누구누구 있소라고 하면 대답 못하는 이들이 많더란 말이재. 공부 좀 했다는 인간들이 말여.”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말씀을 멈추셨다가, 다시 말씀을 하셨다.

 

“대종회 가면 그쪽 어른들이 늘 말씀하셔. 요새 사람들은 자신의 뿌리도 잘 모른다고. 국사알고 세계사 알면 뭐해? 석사에다가 박사하면 뭐해? 정작 자신의 뿌리는 모르는데 말여. 저런 풀 같은 미물도 뿌리가 있기에 존재하고, 나무도 뿌리가 없다면 저렇게 무성할 수 없잖어. 사람도 마찬가지재.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알게 되는 거재.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그런 것은 고리타분하게 여기고, 좀 그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면서 ‘아아 그만하쇼, 그런 거 말해주지 않아도 되요’라고 하니…….”

 

다시 한숨을 쉬셨다. 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워졌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고고학을 전공하고, 문화재를 좋아한다고 하는 나는 과연 내 가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가? 어디까지나 토막상식이고, 그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니,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도, 겉만 아는 것이지, 정작 속은 모르는 셈이라 하겠다.

 

앞서 난 이 분께 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 때 역사를 공부하고, 문화재에 관심이 많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 손을 꼭 쥐고, “그려, 자네 같은 젊은이가 이런 것을 공부해야지. 이런 거 공부하는 이를 보니 참 반갑구만”이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러나 정작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과연 내가 그런 격려의 말씀을 들을 정도가 되는지 자문하게 된다.

 

날은 서서히 저물고 낙안향교도 어느새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그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면서 또다시 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손자병법>에선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白戰不殆)”고 하였으며, 유교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가르친다. 그러는 내가 이런 글귀나 외우고 있지, 정작 지기(知己)를 하고, 수신(修身)을 한 적이 있던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우리 모두 자문해보자. 줄기가 탄탄하고 이파리가 무성한 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 줄기와 이파리를 존재하게 하였던 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9월 15일 낙안향교에 가서 뵌 할아버지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태그:#낙안향교, #안동김씨, #향교,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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