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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겉표지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겉표지 ⓒ 이윤기

동화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저자이자, 1967년부터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마을 교회 종지기로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일생을 살았던 권정생 선생이 기독교와 하느님에 관해 쓴 이 책 제목은 <우리들의 하느님>입니다.

권정생 선생이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환경운동은 먼저 내가 지나친 과소비를 하고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쓴 글인데, 몇 해 동안 신문과 잡지 여기저기에 조금씩 쓴 글을 녹색평론사에서 찾아 모아 산문집으로 엮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도에 나온 책인데, 저는 책이 나오고서 10년이 지나고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이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좋은 책을 만날 때면 좋은 책을 만난 기쁨 못지않게 왜 이런 책이 있는 줄 진작 몰랐을까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이 바로 그런 책 입니다.

제목으로 삼은 ‘우리들의 하느님’을 비롯한 삼십여 편의 글과 세편의 동화를 한 권으로 묶은 책입니다. 책 제목처럼 삼십여 편의 글 중에는 교회와 하느님 그리고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습니다. 제목만보면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글에도 대부분 선생님이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더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이전에도 하느님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와 하느님 그리고 교회에 대한 권정생 선생님 생각이 너무나 이치에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 왔다…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선교사에 의해서 기독교가 이 땅에 전해지기 전에도 하느님이 계셨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일마다 꼬박 꼬박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보기에도 지금 우리 시대는 하느님은 교회에만, 하느님은 기독교에만 계시는 것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해 보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달력이 있으나 없으나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기독교가 없을 때에도 하느님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교회가 금기시하는 전통신앙과 기독교가 서로 불편하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란으로 가던 야곱이 들판에서 돌단을 쌓고 기도를 했던 것처럼, 우리네 조상들은 마을 밖 서낭당에 돌을 쌓으며 신에게 빌었다. 그 신의 이름을 야훼나 서낭당이라고 다르게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기를 점지해주는 천사의 이름이 성서에는 가브리엘이지만 우리는 삼신할머니다. 고기를 먹던 유대인들은 악귀를 쫓는데 양의 피를 뿌렸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물로 악귀를 막았다.” - 본문 중에서

따라서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고,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종교가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야 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 안에는 그 분의 섭리가 깃들어 있으니 만물의 섭리는 곧 자연의 섭리이고 하느님의 섭리는 자연의 섭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빌려 선생께서는 “성서를 수 만 번 읽고 외워도, 수 만 명의 병자를 고쳐도, 일류 신학교의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극히 소박하고 작은 사랑의 흔적은 우리 전통과 관습 속에 수없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가족 중에 누가 길을 떠나면 밥을 떠놓는 것, 그 밥을 나그네에게 대접하는 것,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지 않는 것, 들판에서 밥을 먹다가 나그네를 불러 함께 먹는 것, 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이웃과 나누는 것, ‘고수레’로 던진 음식을 새, 벌레와도 나눈 것, 감나무 꼭대기에 남겨둔 까치밥은 모두 지극히 작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진정 나눔이란 내가 많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선생님 생각입니다. 돈을 잔뜩 벌어서 이웃을 돕기보다는 내가 좀더 가난하게 덜 차지하기만 해도 그게 바로 이웃을 위하는 일이라고 깨우쳐주십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선생께서 한 평생 실제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만드시지 않고 본래 하느님 모습을 찾으려 애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 모두에게서 하느님 모습을 발견했고, 인간의 눈을 뜨게 하시어 각자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을 찾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남과 부활의 참의미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과 부활에 대하여 <다빈치코드>류의 새로운 해석들이 분분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신앙심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다분합니다.

과연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이것은 단순히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동정녀에게서 태어남과 부활에 관한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남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은 다음의 천국이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기 이전에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지 못하고 참되게 죽지 못했다면, 그의 동정녀 탄생이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지금 하느님 우편에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는 것 모두가 값어치 없는 일이다.” - 본문 중에서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의미 있는 것은 그 분이 이 세상에서 참된 삶을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지 그분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거나 사흘 만에 부활한 것 때문은 분명코 아닙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참된 삶을 배우고 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지지 말라”, “높고 낮음을 다투지 말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차별이 없고 평등하며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하느님 법칙대로 사는 나라를 말합니다. 무릇 예수 제자 되기를 원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무소유, 평등 그리고 무계급 사회의 ‘평화로운 사회’ 이 땅에 실현하는 지향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평화의 개념은 억눌린 사람의 해방,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대한 자기 몫 찾아주기, 정의가 살아나고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적 질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기독교와 우상숭배 논란에 관하여도 너무나 이치에 딱 들어맞는 명쾌한 해석이 내려져있습니다. 장승을 잘라버리거나 단군상을 훼손하는 일을 벌이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게 십계명에 나와 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는 대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장승을 토막 내어 잘라낸 그 기독교 학생은 왜 어마어마한 자유의 여신상은 그냥 두고 보고만 있는 걸까? 미국까지 가서 부숴버릴 만한 용기는 없는 것일까? 거기까지 갈 비용 때문일까?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하느님도 크고 힘센 것은 눈감아주는 사대주의자이신가? 작고 초라한 것만 없애라고 하시는 걸까?” - 본문 중에서

십계명에 나와 있는 우상을 ‘문자’로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들어내 오만가지 형상들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든 인형과 마네킹 그리고 위대한 인물들의 동상이나 흉상 그리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조각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네킹이나 인형이 우상이 아니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이 우상이 아니라면, 단군상이나 장승 역시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승이 있든 없든 하느님은 유일하신 하느님이고, 장승은 장승일 뿐이며 단군상은 단군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시골 마을교회 문간방에서 사시다 가신 권정생 선생님은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엔 하느님이 눕고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어 잔단다”하고 대답합니다.

우리시대에 기독교인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사이에서 얼마나 바르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219쪽, 7,000원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녹색평론사(2008)


#권정생#기독교#우리들의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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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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