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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빗소리에 눈을 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정말이지 웬수놈의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창밖에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고 연방 중얼중얼 거렸다. 퀭한 눈으로 축축하게 젖어 잠 못 이루는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추석 전 날 시골에 갔을 때 동생은 피곤에 지친 눈으로 우릴 맞이했다. 농사짓느라 깡마른 얼굴이 더욱 말라보였다. 표정도 밝지 않았다.


“너 어디 아프냐?”
“아프긴, 잠 못 자서 그러지.”
“뭣 때문에 잠을 못 자.”


명절 연휴라 친구들 만나 노느라 잠을 못 잔 줄만 알고 가볍게 말을 받았는데 동생은 우울하고 무거운 대답으로 대신했다.


“비가 오는데 잠을 어떻게 자.”


동생의 말을 듣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하자 제수씨가 눈짓을 하며 그만하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무척 궁금해 하고 있는데 동생이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 그 연유를 짧게 말해준다.


“아주버니, 저이 며칠 째 잠을 못자고 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나락들이 다 쓰러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래요.”
“서른 마지기인가 세 마지기인가 쓰러졌단다.”


제수씨와 말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어머니가 불쑥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제수씨가 속말처럼 중얼거린다.


“어머닌 아직 잘 모르세요.”


무슨 일이가 싶어 동생과 이야길 나누어 보았다. 처음에 동생은 모든 게 귀찮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동생의 행동을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웬만한 문제 가지곤 저럴 동생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야, 무슨 일인데 그래. 엄마 말로는 서른 마지기 정도 쓰러졌다고 하던데.”
“그거면 내가 이러고 있겄어. 다 깔아 버렸어. 막막하고 답답해서 한숨도 안 나와.”

“얼마나 그런데?”
“다 그래. 30필지가 넘어. 빚도 못 갚을 것 같애. 삼사천만 원이 날라가 버렸어.”


동생의 입을 통해 들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 많은 논의 나락이 다 쓰러진다는 건가. 설마 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의 논을 찾아 나섰다. 동생의 논은 감곡, 김제, 시너브(들녘 이름) 등 곳곳에 있었다. 본인의 논도 있었고 남의 논 빌린 것도 있었다.


동생의 논을 찾아 시너브로 가는 길에 만난 대부분의 논의 나락들은 반듯하게 서서 황금물결이 일고 있었다. 가끔 쓰러진 나락들이 보였지만 심한 곳은 없었다. 한참을 논길을 따라 걷자 저만치 동생의 논이 보였다. 그런데 동생의 나락들은 서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주변의 다른 나락들은 멀쩡한데 유독 동생의 나락들만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논바닥에 바짝 엎드려 깔려 있었다.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까맣게 마른 얼굴과 퀭한 눈을 하고 뜬 눈으로 날을 지샌 동생의 얼굴만 쓰러진 나락 속에 아른거렸다.


젖은 논길을 걸었다. 쓰러진 나락들의 형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다. 나락들이 쓰러졌어도 땅바닥에 붙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는 괜찮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모두가 태풍에 쓰러진 고목처럼 배를 납작하게 깔고 물속에 누워 있었다.

 

 
저리 되면 나락은 다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락이 쓰러지면 소출의 50%가 줄어든다. 그리되면 인건비는커녕 비료 값, 농약 값도 건질 수 없다. 더구나 동생이 짓는 대부분의 논은 농업기반공사를 통해 장기로 구입한 것이기에 1년에 갚을 이자만 해도 3000만원 정도 한다.


동생은 지난 몇 년에 걸쳐 농업기반공사를 통해 논을 구입했다. 돈이 부족한 동생이 농사지을 땅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은 그 길뿐이었다. 한 필지 당 매년 이자와 원금으로 내는 돈이 100만원이 넘었다. 또 소작으로 부쳐 먹는 논도 있었다. 올해 그렇게 해서 지은 농사가 근 30필지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도 보통 20년, 30년 상환에 저리 이자로 구입을 하기에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빚을 갚아 나가면 20~30년 후엔 자신의 온전한 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힘든 농사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했었다. 가끔 욕심 부리지 말고 몸 상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농사는 계속되는 비로 완전히 망한 것이다. 그동안 동생은 땅심을 살려야 한다며 돼지똥이나 소똥 같은 거름을 사다 겨우내 논에 내었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모든 나락들을 쓰러지게 한 것 같다며 동생은 눈물을 글썽였다.


거름기가 줄기차게 오는 비로 계속해서 땅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나락 밑둥을 약하게 하면서 쓰러뜨린 것이다.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젊은 동생의 의욕적인 농사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이다. 여기에 기상청도 동생의 절망감을 키우는 데 한 몫 했다.


9월 초, 열흘 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땅이 어느 정도 마르자 동생은 연휴가 시작되면서 나락을 벨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지 않는다고 했던 비가 내렸다. 비가 온다고 했으면 좀 더 일찍 서둘러 나락을 베었을 터인데 기상청 말만 믿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지금 동생은 원망스런 하늘을 바라보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며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어려움을 누구한데 토로하지도 않은 성격이라 속으로 ‘웬수놈의 비야 그만 좀 내려라’하면서 자포자기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잠을 못 이루고 담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동생에게 형인 난 전화를 걸어 위로를 할 용기가 없다. 나의 위로가 더 동생의 마음을 아프고 안타깝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속으로 빌 뿐이다. 용기 잃지 말라고. 비록 지금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건강 꼭 챙기라고. 건강을 잃으면 그 모든 희망과 계획이 끝나버리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건강 조심하라고 빌고 빌 뿐이다. 그리고 웬수 같은 비도 그만 좀 내렸으면 하고 말이다.


태그:#나락, #비, #농사,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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