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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드의 손톱>
<비로드의 손톱> ⓒ 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은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탐정이다. 이건 어찌보면 모순이다. 변호사는 혐의가 있거나 또는 유죄가 분명한 피고인을 변호하는 사람이다.

탐정은 범죄현장을 분석하고 추리해서 범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페리 메이슨은 이런 두가지 일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

이 사실은 페리 메이슨이 어떤 인물인지를 나타내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페리 메이슨은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변호사다. 아직 미혼이고 시내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뭔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가명으로 예약해둔 호텔에 머물기도 한다. 그는 재산이나 이혼 등의 문제는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다루는 문제는 대부분 심각한 형사사건이다.

법률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페리 메이슨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뭔가 법적인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별로 가진 것도 없고 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배경도 없는 사람들이 페리 메이슨을 찾아온다. 시쳇말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의외로 마지막에는 짭짤한 보수를 챙기기도 한다. <기묘한 신부>에서는 사건해결의 보상으로 백지수표를 받을 정도다.

변호사이면서 탐정, 투사인 페리 메이슨

페리 메이슨은 자신을 가리켜 '투사'라고 표현한다. 결코 잘생긴 얼굴이 아니지만,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가졌고 두둑한 배짱이 있다. 돈과 권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싸운다' 라고 말을 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의뢰인을 지킨다. 법정에서는 검사 측의 신랄한 논고를 당당하게 받아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페리 메이슨이 가지고 있는 변호사의 특징이다. 동시에 그는 탐정이기도 하다. 많은 변호사들이 사무실과 법정을 오가면서 활동한다. 반면에 페리 메이슨은 사건현장을 뛰어다니며 용의자를 추적한다. 타인의 집에 불법침입도 하고,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먹을 휘두를 때도 있다. 그는 침착하고 냉정한 변호사이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는 하드보일드 타입의 탐정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은 그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페리 메이슨은 살인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의뢰인을 구하기 위해서 언제나 동분서주한다. 의뢰인이 자신을 속이거나 진실을 숨길 경우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구치소에 수감된 의뢰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페리 메이슨을 쫓아낼 때도 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의뢰인 편에 선다. 그리고 결국은 무죄라는 것을 법정에서 입증하고 만다. 간단하게 말해서 페리 메이슨은 연전연승의 경력을 가진 거물급 변호사인 셈이다.

문제는 페리 메이슨이 거의 언제나 법정에서 해결을 보는 방식을 택한다는 점에 있다. 그럴듯한 추리나 증거가 있어도 그는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사건의 재구성이 모두 끝난 상황이지만, 그는 검사나 형사에게 그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법정에서 증인에 대한 검사의 심문이 날카로와져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반대심문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법정에서 자신의 의뢰인이 점점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려가도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럴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사냥꾼들이 몰려오는 데도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곰을 연상케한다.

하지만 페리 메이슨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그가 조용하게 앉아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킬 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페리 메이슨은 언제나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다.

치열한 법정 싸움을 즐기는 변호사, 페리 메이슨

 <기묘한 신부>
<기묘한 신부> ⓒ 동서문화사
이런 법정 싸움과 화려한 승리를 즐기기 때문에 페리 메이슨은 유명해질 수 있었다. 검사 측의 처지에서 본다면, 페리 메이슨의 이런 방식은 상당히 짜증스러울 것이다.

<말더듬이 주교>에서 한 검사는 페리 메이슨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낸다. 페리 메이슨이 미리 증거물을 검사에게 가져왔더라면 구태여 기소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페리 메이슨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추리과정을 검사에게 들려주기만 하더라도 사건수사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에 페리 메이슨은 법정에서 승부를 보고, 법정에서 갈채를 받는 쪽을 택한 것이다.

페리 메이슨은 실력만큼이나 쇼맨십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상대가 되는 검사는 언제나 법정에서 망신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혼자서 이렇게 많은 사건을 해결할 수는 없다. 페리 메이슨에게도 동료가 있다. 비서인 델라 스트리트,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가 그들이다. 델라 스트리트는 20대의 늘씬한 여성이다. 그녀는 첫번째 작품인 <비로드의 손톱>에서 5년째 페리 메이슨과 함께 일을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델라 스트리트는 언제나 페리 메이슨을 '소장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사무소 소장과 비서의 관계가 아니다. 아무도 없을 때는 사무실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가 하면, 칵테일을 마시면서 흥겹게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델라 스트리트는 관찰력과 직관이 뛰어나다. 여자 의뢰인이 사무실로 찾아오면, 페리 메이슨은 델라 스트리트에게 먼저 그 의뢰인의 인상과 느낌이 어땠는지를 묻는다.

델라 스트리트의 직관은 빗나갈 때가 없다. 때로는 '그 여자는 위험한 인물이에요'라고 페리 메이슨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페리 메이슨의 대답도 한결같다.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자신은 의뢰인을 버릴 수 없다고 한다. 페리 메이슨은 융통성이나 타협과는 무관한 인물이기도 하다.

비서, 사립탐정과 함께 사건을 수사하는 페리 메이슨

페리 메이슨을 돕는 또 한명의 인물은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다. 그는 드레이크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탐정답지않게 천진한 얼굴과 표정을 가진 인물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때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폴 드레이크는 페리 메이슨의 지시를 받아서 어떤 인물의 뒷조사를 하고, 잠복근무를 하며 차를 타고 미행을 한다.

페리 메이슨이 의뢰받는 일은 항상 복잡한 살인사건으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별것아닌 법률상담이었지만, 어느새 그 사건에는 많은 사람들이 얽히게 된다.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진흙탕으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뛰어난 변호사라고는 하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 페리 메이슨은 델라, 폴과 함께 역시 때로는 속임수를 써가면서 싸움판에 뛰어든다.

<기묘한 신부>에서는 아파트의 벨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는 조작을 하고, <말더듬이 주교>에서는 델라를 다른 인물로 위장하게 만든다. <비로드의 손톱>에서는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서 함정을 설치하고, <토라진 아가씨>에서는 사건을 기각시키기 위해서 의외의 테스트를 검사 측에 제안한다. 상대방이 협박과 기만을 들고 설친다면, 이쪽에서도 페어플레이만을 고집할 수는 없지 않을까?

페리 메이슨을 창조한 작가는 미국의 얼 스탠리 가드너다. 가드너는 실제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변호사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기 자신을 모델로 해서 페리 메이슨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도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페리 메이슨. 그는 자신을 투사로 규정했으면서, 고집스러울 정도로 의뢰인을 포기하지 못했던 우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인 가드너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다. 하지만 사망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수십편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발표해서 수많은 독자를 거느리기도 했다.

독자들은 페리 메이슨이 법정에서 검사에게 쏘아붙이는 날카로운 언변에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페리 메이슨은 탐정이나 투사라기보다는 천상 변호사였던 셈이다.


비로드의 손톱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박순녀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2003)


#페리 메이슨#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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