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훈(安秉勳, 69)씨를 만났다. 얼마 전까지 박근혜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그다.
어찌보면 그것은 뒤늦은 외도였다. 그는 스스로를 "평생 <조선> 사람"이라고 했다. 39년간 <조선>에 몸담았다.
한나라당 경선 직후부터, 나는 언젠가 '인물연구 박근혜'를 쓸 생각으로 박 캠프 사람들을 만나왔다. 꼭 그것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박근혜의 남자' 안병훈씨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요즘 안티조중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그룹 중의 하나가 바로 박근혜 지지자들의 모임인 박사모다. 그들은 아직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통령 예비후보를 뜨겁게 지지하기 때문에 '안티 조중동'도 열렬히 하고 있다. 경선 때 조중동이 이명박 후보를 편파 지지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 <조선> 사람'인 안병훈씨는 한나라당 경선과정의 언론보도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왜 언론인생활 39년 끝에 박근혜씨를 좇아 정치세계로 뒤늦은 외도를 했을까?
이명박-박근혜 공조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른 요즘, 박근혜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나?
"평생 남을 인터뷰했지, 당해본 적 없는데..."안병훈씨는 요즘 경선패배 후유증에 시달리는 캠프 사람들을 달래며 산다고 했다. "경선에서 지니까 좌절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이 하도 술을 마시게 되니…."
추석 직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평생 남을 인터뷰했지, 인터뷰를 당해보진 않았는데…"라면서 한사코 정식 인터뷰를 사양했다. "나는 캠프에 있을 때도 입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체 기자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라는 명함을 건네면서 최근 그의 출판사에서 펴낸 책 <중간은 없다 -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로 화제를 돌렸다. 자신은 대선정국에서 이미 떠났다는 듯. "패자라서 할 말도 없고…."
오랜 설득이 필요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는 기록돼야 한다"면서 녹음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 글은 '반강제 인터뷰'다. 하지만 그와 문답을 주고받을수록 그가 가슴에 할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 중간중간 "절실하게" "뼈저리게"라는 표현이 나왔다.
한나라당 경선때의 언론보도들을 보고 스스로 언론인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언론계 40년을 절실하게 반성했다"고도 말했다.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캠프의 좌장으로서 방상훈 사장 등 <조선> 사람들에게 했던 '입장 전달'과 '항의'도 어렵사리 꺼냈다. '살아있는 권력 이명박'을 대하는 언론과 검찰의 태도도 비판했다. 딸도 신문사 기자인데,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 할 말이 많아보였다.
"선거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진다고 생각 안했다"
안병훈씨는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1975~1978) 박근혜씨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박근혜씨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때였다.
"박근혜씨가 도와달라고 해서 두달 동안 고민했다. 크게 고민은 세 가지였다. 첫째, 나는 정치에 생각이 없는 사람인데, 설사 그냥 도와주는 일이라 하더라고 꼭 가야 하나. 둘째, 여자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거절해야 하나. 셋째, 그 당시에 여론조사하면 이명박 48%, 박근혜 18%였는데 지고 있는 후보에 가야 하나. 뭐 그런 것들 때문에 고민을 두달이나 했는데…."결국 "딱 6개월만 도와주자"는 심정으로 갔단다. 2007년 1월초 정치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 그런데 왜 이명박이 아닌 박근혜를 선택했나?
"박근혜씨를 통해서만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고 믿은 거다. 또 한국도 이제 리더십의 스타일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정치 냄새가 덜 나고 깨끗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봤다. 내가 박 캠프로 들어갈 당시의 여론조사는 더블스코어 이상 차이로 뒤지고 있었지만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박 캠프에 들어간 이후 "단 한번도 진다는 생각을 안해봤다"고 했다. "기자들은 안 믿었지만 선거혁명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마지막 투표일(8월19일) 오후 5시경에 서울 투표율이 60%가 넘었다는 보고를 받고 잠깐 불안했을 뿐 캠프에 들어간 날부터 단 한번도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신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감동' 속에서 경선의 나날들을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젊은 초선의원들과 캠프 식구들이 밤잠을 안자고 자기 돈 들여가면서 열심히 했다. 그것을 보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감동적이었다."
그는 물기가 어린 눈을 꿈벅이며 말했다.
"그런 분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줬으니…. (선거대책위원장인) 나의 죄가 얼마나 큰가요?”"
'박근혜의 남자'가 마지막 장면에 함께 하지 못한 까닭'박근혜의 남자'인 그는 경선이라는 전쟁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근혜 후보와 함께 하지 못했다. 너무나 박근혜 후보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기에 '패자 박근혜'의 모습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 승리자 발표 현장(올림픽공원)에 있지 못했다고 했다.
"후보에게 너무 미안해서…. 발표 직전 현장을 떠났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의 승복연설을 차안에서 들었다. 그 장소에서는 도저히 박근혜 후보의 지는 모습을 못 보겠더라고."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그의 마지막 공식 역할은 “우리가 졌다는 사실을 후보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박 후보가 연단에 처음 올라갈 때는 우리가 약 2000표를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1시간 후에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지게 됐다. 그래서 내가 유정복 비서실장 등과 상의해 ‘후보에게 빨리 우리가 졌다는 사실을 알려드려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현장을 나왔다."
- 앞으로 이명박 후보에게 박근혜씨가 어느 정도 협조해줄지가 관심인데."선거는 어떤 것이든 승자독식이다. 패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이명박과 박근혜는 100대0이다. 박근혜를 어떻게 담아내느냐는 이명박쪽에 달려있다."
"박근혜 캠프 가기 전 <조선> 사주들에게 통보했다"안병훈씨는, 그의 말처럼 "언론계에 있을 때 지는 것을 몰랐다".
1938년 황해도에서 출생한 그는 1965년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사내에서도, 다른 언론과의 경쟁에서도 '승자'였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과 전두환 시대의 시작인 1979년에서 1983년 사이에 그는 신문사의 꽃인 정치부장·사회부장으로 일했다.
전두환 정권 후반부인 1985년에서 1986년말까지는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가 편집국을 좌지우지하던 이 전두환 정권때 <조선>은 판매부수 1위 신문사가 된다.
그후 안병훈씨는 상무이사(1988년)·전무이사(1992년)·편집인 겸 부사장(1998년)으로 승진했고, 사주가 아닌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자리인 대표이사 부사장(2002년 3월~2003년 12월)에 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그는 조선일보사를 퇴사했다. 한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 40년간 가장 <조선>다운 <조선> 기자의 한 사람이 안병훈씨"라고 말했다.
퇴사 이후에도 그는 2005년부터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면서 <조선일보>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런 <조선>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정치권으로 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조선일보> 사주들과 상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 사주들과 미리 상의했나?"지난해 12월 말에 방우영 회장을 찾아갔다.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시더라. 경위를 설명하면서 '박근혜씨측에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안도와주면 치사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야, 안병훈 역시 남자로구나' 했다. 그 다음에 방상훈 사장한테도 이야기했다. 방 사장은 '지금까지 언론인으로서 좋게 이미지 쌓아왔는데…' 하면서 다소 걱정하셨다."
그는 "내가 박근혜 캠프로 가서 일하는 것이 <조선>에 누를 끼치게 될까봐 엄청나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주들을 찾아갈 때는 이미 결론을 다 내린 상태였다"고 말했다. "상의가 아닌 통보였다"고 했다.
"평생 <조선> 사람이지만 나온지 3년반이 지났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외면할 수가 있겠나. 나를 던지지 않고는 주위에서 이해를 잘 못해줄 것 같아서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장 등 그 때까지 사회적으로 갖고 있었던 관악언론인회 회장,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등 10여개의 명예직 타이틀을 다 내놓았다."
"나도 언론계 40년 했는데... 절실하게 반성한다"안병훈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뼈저리게"라는 표현을 종종 썼다. 경선전에서 느낀 언론에 대한 섭섭함도 그런 비슷한 단어들과 함께 표출했다.
박근혜 지지자 모임인 박사모가 여전히 인터넷공간에서 "이명박 편파지지 조중동을 규탄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점잖게 그러나 절절하게 언론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 박근혜 캠프에 있었던 사람들은 조중동의 경선보도에 대해 아직도 불만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안병훈씨도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그 문제로 화를 많이 냈다고 들었는데. 안병훈씨는 "그럼 여러 가지 불평불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우선은 그 뭐 이게 지금 사실은 말하기 어려운 게…"라면서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가 언급을 하게 되면 "후배들 욕하는 게 되고 내가 있던 신문사를 그렇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답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그래도 그는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많아 보였다. "언론계의 발전을 위해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기자가 답을 기다리는 표정을 계속 짓고 있자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언론이 이렇게 중요한지를 내가 근 40년 (언론계에) 있던 사람이 현장이 와 있으니까 실감을 했다. 근데 언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까? 내가 절실한 반성을 했다."
절실한 반성! 자신이 직접 언론에 '당해보니' 알겠다는 거였다.
"경선하고 무관한 자리에 가면 내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언론인의 역할이 과거에도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지만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언론이라고 완전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사람들이 자꾸만 언론을 비판하는 것을 언론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고 그냥 치부할 게 아니”라고 했다.
- 경선을 거치면서 언론에 섭섭한 게 많이 생겼나 보다."그 뭐 많이 있는데요, 많이 있는데, 진 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그는 몇 차례 "아이구 나 이거" "하여튼 그 뭐, 허허" 하면서 톤을 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언론의 자기 역할이 뭡니까. 사명과 원칙에 충실해야 하는데…. 남이 하는 말을 옮겨 주는 것이 언론이긴 하지만 옮겨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않나.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그러니까,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지지자들은 왜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이명박 후보 의혹의 실체를 검증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걸 지적하는 거였다.
"여론조사 예측 다 틀렸는데 반성하는 언론 하나 없다"40여년 언론생활을 "절실히 반성"할 정도로 한나라당 경선때의 언론보도에 실망한 안병훈씨. 그렇다면 '평생 <조선> 사람'인 그는 경선 때 박근혜지지자들로부터 편파보도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조선>에는 어떤 대응을 했을까?
- 박근혜 캠프 사람들을 만났더니 안병훈 선거대책위원장이 직접 <조선> 방상훈 사장을 찾아가 '편파보도'에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하던데."그건 뭔가 잘못 전달이 된 것 같다"면서 그는 경선과정에서 3가지 경로를 통해 자신이 <조선>쪽을 만나 박근혜 캠프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조선>의 정치부 기자들.
"지금도 후배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 <조선> 정치부 후배들과 저녁 먹기로 했는데…. 우리가 (그 때) 이야기한 것은 우리 눈에는 편파라고 비쳐진 것에 대해서, 적어도 경선 때는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똑같이 좀 취급해달라. 그리고 본선에 가서 자기네들이 한나라당 후보에 힘을 실어주려면 실어주고, 한나라당끼리 좀 싸우는 것은 그냥 이렇게 (편파라고 비쳐지지 않게 보도) 해달라고 했다."
두 번째는 <조선> 편집인에게 전화 항의를 한 이야기였다.
"편집인에게 한 번 항의전화한 것은…. 이명박씨 도곡동 땅 관련해서 검찰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를 <조선일보>가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음날 인터넷판인 <조선닷컴>에서 별다른 사실 제시없이 바로 오보라고 이명박씨에게 사과를 했다. 그것을 이명박 캠프에서 마지막 합동유세장에서 엄청 활용했다. 그래서 항의했다. 검찰 쪽에서는 시인도 부인도 안 하고 있는데, 사실 자체가 확인이 안 됐는데 왜 오보라고 사과를 먼저 하느냐고."
세 번째로, 방상훈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의 여론조사 보도 문제에 대해 '항의'했다고 했다.
"(언론들의 편파보도 가운데) 제일 문제가 된 것이 여론조사다. 여론조사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자주 하고, 일주일에 수없이 나오는 여론조사가 (이명박 지지) 밴드왜건 효과(타인의 선택에 의사결정이 영향을 받는 것)를 줬는데…. 엉뚱한 여론조사를 너무 자주 했다. 당심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432표를 이겼는데,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예측대로라면 우리가 1만몇천표를 졌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에 대해 반성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 여론조사 나올 때마다 우린 초상집... 허허"안병훈씨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방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일보>에 항의한 것은, 왜 <조선>이 이명박 캠프의 고문인 최시중씨가 대주주로 있는 한국 갤럽과 여론조사를 해서 보도하느냐는 거였다. <조선> 여론조사 나올 때마다 우리 캠프는 초상집이었다. 특정 캠프의 좌장과 관련있는 여론조사기관과 손잡고 한 것은 <조선>이 잘못한 거다. 그래서 항의를 했는데, 방 사장이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다른 여론조사 기관 하고 섞어서 하더라."그는 이렇게 이야기해놓고도 자신이 몸담았던 언론계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아이구 나 이거" "하여튼 그 뭐, 허허"를 반복했다.
그런 다각적인 항의도 결국 '효과'는 없었다. 그의 말처럼 선거는 승자독식. 패장이 된 그는 경선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 기록'을 위한 인터뷰에 응하고 있을뿐이다. 그는 식은 커피잔을 입술에 가져가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막판에는 우리도 (언론들을) 다 포기했어야 했어요. 다 저쪽 편인 것 같으니까."
후배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했더니 '조작된 기계적 균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내가 현직 언론인이라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데…. 균형 보도를 한답시고, 두 후보 중 한 쪽이 흠이 있으면 그걸 보도하느라고 다른 한쪽은 흠도 없는데 일부러 만들어서 보도를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이명박 후보는 의혹이 진행형으로 나오는데, 그걸 보도하면서 박근혜의 몇십년 된 박 대통령 시절 이야기를 들이대니…."
"언론은 권력과 싸워야... 지금 살아있는 권력은 이명박"2시간 동안의 인터뷰가 막판에 이를 즈음 안병훈씨는 언론의 사명에 대해 강조했다.
"우리가 (경선 때 언론인들을 만나면) 언론의 사명에 충실하라고 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살아있는 권력이 MB(이명박) 아닙니까? 검찰도 (이명박에 대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았고."- 어찌보면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한 권력이다."그러니까…. 그것과 싸우느라고 (경선 때 언론에게) 우리 약자 편 좀 보살펴달라고 했는데…."
39년간 '<조선> 사람'이었던 안병훈씨. 한나라당 경선 때의 대한민국 언론을 보면서 언론계 생활을 "절실히 반성했다"는 그가 후배들에게 남긴 말이다.
"살아있는 권력과 싸우는 게 언론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