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서면 좌측 거울에 자랑스런 메모가 붙어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에 옛날 표기법으로 쓴 알림장이 그것. 다름아닌 수도 요금 공지다. 이달엔 여름이라 그런지 제법 많이 나왔다. 이 집에는 총 열 가구가 사는데, 두 달에 한 번 주인댁에서 식구 수대로 계산해 이런 방법으로 알린다. 그런데 나는 그 글을 볼 때마다 싱긋이 웃음이 나온다.
평상시에는 얼마를 내야 하나 숫자만 봤지만 이번에는 다 읽어보았다. 수도 요금은 다달이 늘어가는 추세. 이달 요금은 식구 일인당 1만4800원이다. 식구가 적으면 그나마 낫지만 식구가 많은 집은 꽤 부담이 될 것이다. 그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물을 아껴 쓰자는 할아버지 특유의 아첨성 글귀가 첨가돼 있다.
처음 이사와서 알림장을 보고는 다음달부터는 컴퓨터로 쳐서 뽑아드려야지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삐뚤빼뚤한 할아버지의 글씨가 호소력도 있고 훨씬 눈에도 잘 띌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달에 한 번은 꼭 이렇게 삐뚤빼뚤 쓴 알림장이 열흘쯤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왼쪽 거울 위에.
"아무개씨! 아무개씨!"... 택배아저씨의 외침내가 이곳 옥탑에 산 지는 2년이 조금 넘었다. 가장 불편한 건, 우편물이다. 조그만 우편함에 열 가구의 우편물이 들락날락하자니 복잡하다. 우편물은 이미 이사간 집 것도 배달돼 항상 한 뼘이나 쌓여 있다.
가끔 한 번씩은 수북이 쌓인 우편물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내 이름이 섞여 있나 꼼꼼이. 그러나 여러 사람 손을 거치다 보니 엉망일 때가 많다. 바닥에 흩어져 있기도 하고 위 아래로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 있기도 하고. 보다 못한 주인댁(80세 할아버지와 79세 할머니)이 작은 스티로폼 박스를 거울 밑 바닥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편물과 획획 집어 던진 휴지조각, 댐배 꽁초, 홍보딱지 들과 혼합, 치우는 것 역시 주인 몫으로 돌아갔다.
이사온 다음 날부터 난 특별한 외침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골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마구마구 외치는 소리였다.
"아무개씨! 아무개씨!"
앞에도 다가구, 양 옆에도 다가구이니 이름을 알아 들은 사람이 있으면 대답을 할 텐데, 대답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나중에야 택배가 왔을 때란 걸 알았다. 그 우렁찬 소리는 한참동안 이어진다. 난, 저러다 저 아저씨 목소리 확 가지 싶어 내다 보지만 그 아저씨의 표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사도 잦고 가구수도 많다 보니 이름 부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아파트 담 너머 다가구주택가 풍경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다가구 주택이 갈린다. 우리집은 높은 옥탑이기 때문에 뒤쪽의 연립주택과 아파트 담 너머 풍경, 또 다른 다가구 주택들의 사는 모습도 확연히 보인다. 아파트와 우리 골목과는 아예 딴나라 같다.
쓰레기만 해도 그렇다. 아파트는 한 곳에 모았다 커다란 쓰레기 차가 와서 단번에 실어 가지만 우리 동네는 미화원이 저녁 6시부터 작은 손수레로 실어 큰길가에 모아 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새벽을 틈타 큰 차가 와서 실어간단다. 어딜 가나 쓰레기는 참 많다. 산처럼 쌓여가는 쓰레기를 보면 참 인간이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여름, 쓰레기를 실어나르는 아저씨와 마주쳤다. 구슬땀을 흘리며 쉬지 않고 쓰레기를 나르던 아저씬 이내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아파트는 그냥 한 번에 실어가면 되지만 여긴 워낙 좁은 골목이 많아서 이렇게 일찍 나서야 해요."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긴 정말 미로처럼 좁은 골목이 많다. 한번은 외출에서 돌아오다 웽웽 거리며 우리 동네로 들어서는 불자동차를 보았다.
그럴 땐 괜히 겁이나 불자동차의 방향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데 이 불자동차 길을 잘못 들어 다시 큰길로 나갔다 들어와야 했다. 그러나 그 근처까지만 갔지 불난 집 앞에는 갈 수가 없어 긴 소방호스로 간신히 불을 껐다. 골목이 너무 좁기 때문이었다.
"이 좁은 골목에 웬 주차 단속?"최근 이 골목에 고민이 하나 생겼다. 좀 큰 골목, 그러니까 자동차가 다니는 길에 불법주차딱지를 붙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이 좁은 골목까지 주차 단속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꽤 오래 시끄럽기에 옥상으로 나가보았다. 역시나 늘 그곳에 차를 세워 놓는 까만 승용차와 노란 태권도학원 차가 말썽이다.
서민들의 골목. 사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니니까 그냥 놔둬도 괜찮은데 굳이 단속을 하는 이유는 무언지, 내가 생각해도 야속하다. 하지만 사람들과 언쟁을 하면서도 계속 단속을 한다. 세금이 부족해 그러느냐. 왜 서민을 못 살게 구느냐. 아무리 대들어도 자기들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며 막무가내다.
오늘은 주차위반 딱지를 끊지 않는 대신 차를 몰고 빨리 빠져 나가라고 한다. 과잉단속은 과잉단속인가 보다. 그 정도 눈감아 주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 건물에는 차 있는 집이 한 집뿐이다. 고물 사륜구동차지만 그나마 차주인이 음주운전을 하다 걸려 차는 고스란히 뒤꼍에서 보관중이다. 주인댁 할머니는 이런 집에 차 있는 사람이 살겠어, 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모두 생계형 차일 텐데, 좀 봐 주면 안되나.
사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궁핍하다. 그런데다 여기는 보통 월세들이라 형편이 아주 어려운 편이다. 쪼개고 쪼개서 이리 쓰고 저리 쓰면서 겨우겨우 사는데 주차비까지 내기는 벅찬 것이다.
담너머 아파트에는 제법 널직한 자리가 있다. 다 출근하고 난 뒤라 그렇겠지만, 오늘은 왠지 빈자리가 얄밉게 보인다. 이곳에서 보면 아파트는 무슨 특권을 가지고 사는 곳 같다. 주차니 쓰레기니 모두 저절로 해결되니 말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아파트에 못살아 안달인 것이다. 아파트 값을 다락 같이 올려 놓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