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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입구 입구를 종이로 써 붙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부신 나신들이 있었다.
▲ 목욕탕 입구 입구를 종이로 써 붙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부신 나신들이 있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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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으로 가을색이 물들고 있다. 거리는 한 여름의 열기 따윈 잊혀진 지 오래다. 시월. 가슴으로 쓸쓸한 바람이 들고 나는 계절이다. 추석 때까지만 해도 땀을 씻어 내기 위해 계곡 물을 찾았으나 시월이 되면서는 손 끝도 담그기 싫어진다.

몸을 씻는 일은 참으로 귀찮은 일 중 하나

몸을 씻는다는 일은 참으로 귀찮은 일 중 하나다. 영화에 나오는 근사한 욕조라면 귀찮은 일도 아니겠다. 거품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포도주 한 잔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그러했다. 아니 단 한 번 욕조가 있는 집에 살았던 적은 있었다. 애옥한 시골살이지만 비어 있던 집을 구해 수리를 하면서 부엌 한켠에 큰 욕조 하나를 들여 놓았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을 때면 기름 보일러를 펑펑 돌린 후 뜨거운 물을 받았다. 거품이 잘 나는 비누를 풀었던 적도 있다. 포도주 대신 먹다 남긴 소주를 마시며 혼곤하게 늘어졌던 기억도 있다.

이 정도 언급하면 욕조와 함께 하는 풍경이 제법 나올 법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겨울이면 눈발이 욕조까지 날아들 정도로 틈이 난 벽은 비닐로도 몰아치는 칼바람을 막지 못했다.

이와 더불어 욕조 주변으로는 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으니 근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마저도 고향인 정선의 가리왕산 자락으로 이사를 하면서 욕조와의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집에서 찬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고작 두어 달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하니 나머지 세월은 목욕탕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처음엔 보일러를 돌려 샤워를 했지만 이리저리 셈을 해보니 목욕비가 기름값보다 싸다는 것을 알았다.

그쯤되니 씻는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 게 되었다. 도시에 살 때만 해도 어쨌거나 매일 샤워를 했던 터라 지금의 생활 방식은 스스로 생각해도 멋쩍은 일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함께 사는 어머니가 전부이니 그런 게으름이 통하기도 했다.

목욕탕 매표소 작은 창 하나로 손님과 주인이 만난다.
▲ 목욕탕 매표소 작은 창 하나로 손님과 주인이 만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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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는 세월의 때를 견딜 수 없을 때 이용하는 목욕탕이 있다. 집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읍내 목욕탕이다. 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뽕나무가 마당가에 있는 오래된 목욕탕이다.

그 목욕탕은 정선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그러니까 정선군에서 최초로 세워진 목욕탕이다. 1960년대 중반에 문을 연 '정선목욕탕'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예전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목욕탕을 찾게 한 것은 '여선생님'과 '용의 검사'

목욕탕은 사람들의 꾀죄죄한 모습을 반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훤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사라진다. 번듯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곳인 목욕탕. 목욕탕은 갖가지 사연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남긴 때를 묵묵히 치워준다.

정선목욕탕을 한 번이라도 다녀가지 않은 정선 사람은 없다. 지금이야 목욕탕이 몇 개나 있으니 선택의 폭이 넓지만 예전만 해도 목욕탕에 오면 아는 얼굴들을 다 만났다. 오히려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세상을 알아가고 코 밑이 거뭇거뭇해지던 나이에 자신의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목욕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용의 검사' 때문이었다.

미리 예고한 용의 검사를 피할 길 없을 때면 하는 수 없이 목욕탕으로 걸음을 해야 했다. 목욕하는 일에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엔 목욕비도 큰 부담이었다.

너나 없이 집에서 물을 데워 적당히 씻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부스럼이 온 몸을 덮어도 어른들은 저들도 그렇게 자랐노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때로 얼룩진 몸을 이십대 초반의 여선생님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목욕탕을 찾았을 때 만났던 이를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만났다. 세월을 비켜 갈 수 없었던 그이도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목욕탕을 한 지 40여년이 된다는 그녀는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 목욕탕 입구에서 돈을 받고 수건과 목욕용품을 내어주는 일로 소일하는 그녀에게 목욕탕을 하게 된 사연을 물었다.

"애들 아버지가 버스 영업을 했어요. 버스 세 대를 강원여객에 넣고 영업을 하다 그 일에서 손을 떼면서 정선에 머물러 살게 되었지요. 처음 이 목욕탕은 정선군청에서 운영했어요. 그러다가 민간에게 불하를 했고 경매를 통해 목욕탕을 하게 되었어요."

정선군에 목욕탕이 없던 시절 군청에서 목욕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매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이틀 정도 날을 잡아 목욕탕을 돌렸단다. 당시의 집은 양철 지붕으로 바람이 불면 집이 흔들리기도 했단다.

목욕탕집 주인 할머니 40여년을 이 자리에서 보냈다. 한 평도 되지 않은 공간이 할머니의 직장이다.
▲ 목욕탕집 주인 할머니 40여년을 이 자리에서 보냈다. 한 평도 되지 않은 공간이 할머니의 직장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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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목욕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시설이지만 그래도 영업은 괜찮았다고 그녀는 전한다. 외관을 수리한 탓에 그녀가 전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예전 집의 모습은 느껴볼 수 없었다.

정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 지닌 '추억의 목욕탕'

아들이 쓰는 정선사투리에 비해 그녀의 말투는 아직도 대처에서 살아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춘천에서 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지금은 세종대학교가 된 수도여사대를 졸업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문턱도 높았던 당시의 삶을 생각하면 엄청난 인텔리인 셈이었다.

그런 그녀가 정선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선목욕탕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 때문이었다. 막내 아들과 함께 목욕탕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여탕을 관리하는 몫은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요즘 손님은 많냐고 물었다.

"지금은 작은 읍내에 목욕탕이 네 개나 되어요. 사람들은 시설 좋은 곳을 찾게 마련이지요. 그래도 군청이 가까이 있어 그나마 유지 되는 겁니다."

요즘은 기름 값이 올라 목욕탕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손님이 있건 없건 물은 데워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어땠냐고 물었다.

"아유, 그땐 정신 없었어요. 욕탕에 사람들이 오글오글 했었어요. 명절 전이면 물보다 사람이 더 많았어요. 물 바가지를 서로 쓰려고 다투기도 했으니까요."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사람들의 인심도 바뀌었다.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설이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몰려갔다. 그런 이들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자금을 투자할 여력도 없다고 한다.

오히려 변하지 않은 모습을 좋아해 단골인 사람도 많다고 한다. 사람이 넘치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올 수 있다는 정선목욕탕은 적어도 현대인들에겐 '추억의 목욕탕'이다.

전동 때밀이 기계 손님을 위한 작은 배려. 스위치를 누르면 기계가 돌아간다. 의자에 앉아 등을 대면 때가 밀린다.
▲ 전동 때밀이 기계 손님을 위한 작은 배려. 스위치를 누르면 기계가 돌아간다. 의자에 앉아 등을 대면 때가 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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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로 들어가보면 정선목욕탕이 어떤 곳인지 한눈에 확인된다. 가정집 거실만도 안 되는 공간에 평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엔 신문과 재떨이가 올려져 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금연'이라는 말에 주눅드는 애연가들에겐 이 보다 좋은 공간도 없을 듯싶다.

옷을 벗어 두는 옷장은 도시의 지하철에 있는 물품 보관함 크기보다 조금 길다. 옷장 문을 열어보면 그 흔한 옷걸이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다. 값비싼 양복을 입은 이들이라면 난감할 순간이다.

목욕탕 이용하던 어릴 적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선목욕탕을 이용하는 이들은 옷을 벗어 넣고 옷장을 열어 놓는다. 열쇠가 있다고 해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옷을 옷장에 넣지 않고 옷장 문에 걸쳐 놓는다. 지갑이 두툼한 이라면 기겁을 할 목욕탕이다.

목욕탕을 이용하는 문화가 그러하니 새삼스레 유난을 떨 이유도 없는 곳이다. 옷을 아무 데나 걸쳐놓아도 지금까지 지갑이 어떻게 되었다는 손님은 없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보면 더 정겹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처음 왔을 때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선목욕탕은 도시의 목욕탕처럼 목욕타올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수건도 한 장씩 배급을 받으니 여유롭게 사용할 곳도 아니다. 여느 목욕탕처럼 때밀이 아저씨도 없다. 손님이 많지 않으니 사람의 손을 둘 입장도 아닌 것이다.

정선목욕탕이 손님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면 전동 때밀이 기계이다. 스위치를 누르고 의자에 앉아 등을 대면 때가 시원하게 밀린다. 사람의 손 맛보다야 못하지만 혼자 온 사람이나 노인들에겐 요긴한 기계이다.

김이 뿌옇게 서린 목욕탕은 은밀함에 앞서 누구에게나 솔직한 공간이다.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를 확인시켜 주고 확인 받는 목욕탕에서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이제 정선목욕탕에서는 까까머리를 하고 수줍게 옷을 벗던 어린 나신들을 만날 수 없다. 어른이 된 지금 정선목욕탕을 가는 것은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토토처럼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기 위함이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목욕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삶은 풍요롭다. 그런데 어린시절 부끄러운 듯 몸을 열던 눈부신 나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친구들 처음 목욕을 했던 정선목욕탕을 기억하기나 할까.

목욕탕 내부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다.
▲ 목욕탕 내부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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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정선군#1호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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